1793년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의
단두대 앞에 무릎 꿇은 한 남자는 바로 프랑스 왕 루이16세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왕녀 마리앙투아네트와 결혼한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왕 루이16세는
루이15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죽음을 맞는 비운의 인물이죠.
그런데 루이16세는 왕이 되기 전부터 특이한 습관이 있었습니다.
음식의 가짓수가 21개가 안 되게 피했고, 21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었죠.
또한 매달 21일이 되면 외출을 삼갔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의 17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루이16세는 잔병치레를 많이 하고 결핵으로 생사의 고비에 서게 되면서
루이15세는 루이16세의 앞날이 걱정되었죠.
그리하여 점성가를 불러 루이16세의 운명을 점치게 되는데
점성가는 곧 건강을 되찾게 되며 왕이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추가로 뜻밖의 예언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숫자 21을 조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입게될 거라고 엄포를 하죠.
몇년 후 점성가의 예언대로 형과 아버지가 사망하며, 루이16세는 왕위 계승자가 됩니다.
그후 숫자 21을 조심하라고 당부를 받은 루이16세는
숫자 21과 관련된 일에 병적으로 조심하기 시작했죠.
1774년 루이15세가 사망하자 루이16세는 프랑스의 새로운 왕이 됩니다.
하지만 그후에도 숫자 21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는데,
대관식이 있던 1775년 루이16세는 그해가 21살이 된다는 사실에
대관식을 미루고 싶어하기까지 합니다.
불안감에 휩싸인 채로 서둘러 대관식을 마친 후
당시 관례대로 왕립학교로 가서 학생대표의 환영사를 듣게 되는데,
불안해진 루이16세는 환영사를 듣지도 않고 왕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뿐만 아니라 왕족들이 도박과 사치로 진 빛을 갚아달라며 영주들이 찾아오죠.
그런데 찾아온 영주들의 숫자가 21명이라는 두려움에 빛을 갚아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일들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된다는 것을 몰랐는데,
프랑스 왕실의 재정은 선왕인 루이15세가 40억 리브르의 국채를 남기고
상환조차 빠듯한 최악의 상황 까지 발생합니다.
왕실은 영주들에게 빛을 갚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불평등한 시회구조와 신분차별에 분노한 사람들은
높은 세금으로 삶이 피폐해지자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일으킵니다.
이때부터 21의 저주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목숨에 위협을 느낀 루이16세는 가족을 데리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바렌느에서 체포됩니다.
그날이 바로 1791년 6월 21일!
그후, 국민공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한 날은
1792년 9월 21일!
결국 루이16세는 공개재판을 받게 되는데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루이16세가 사형을 받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국민공회를 이끄는 수장인 로베스피에르 라는 사람이죠.
루이16세의 사형을 주장하며 11차례 연설을 하며 루이16세를 죽음으로 몰았는데,
그는 바로 17년 전, 루이16세에게 환영사를 낭독했던 학생이었습니다.
루이16세는 숫자 21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떠났지만,
이 일로 모욕감을 느꼈던 로베스피에르는 그날의 악연으로 인해
루이16세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하네요.
뿐만아니라 루이16세가 처형당한 단두대는 파리대학 의학부 교수였던 기요탱이 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단두대가 처음 만들어진 날이 1790년 1월 21일 이라네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단두대 사용을 허락한 사람이 바로 루이16세라고 하는군요.
얼마 후, 루이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날 역시 1793년 1월 21일 이었죠.
숫자 21을 피하려고 노력했던 프랑스 왕 루이16세는
과연 숫자 21의 저주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일까요?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