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시를 영웅 만든 사회, 이장덕을 죄인 만든 사회

프랜시스 켈시라는 미국의 여성공무원이 있었다.
소속은 FDA 즉 미국식품의약국이었고, 하는 일은 신약에 대한 심사 후 판매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고용되자마자 첫 과제로 주어진 일은 임산부의 입덧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어떤 신약이었다.
켈시는 독일에서 개발한 이 신약을 미국에서 판매해도 되는지를 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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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 ‘임신증후군’ 신약, 유럽서 선풍적 인기

약의 이름은 탈리도마이드. 입덧뿐만 아니라 두통, 불면증, 식욕저하 등
거의 모든 임신증후군에 잘 듣는다는 소문에 유럽 각국에서는 선풍적인 반응을 보였고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진입을 코앞에 둔 상태였다.
 
제약회사는 이미 유럽 각국에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으므로 미국에서도 의례적인 심사과정을 거쳐
즉시 판매 허가가 나올 것을 기대했지만, 담당자인 켈시 박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 약이 사람에게는 수면제 효과가 있는 반면에 동물에게는 효과가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켈시는 제약회사 측의 집요한 요구에도 차일피일 시간을 끌며 승인 허가를 미루었다.
영화 [식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미국 제약회사들의 로비와 압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가며 승인 허가를 질질 끌었다.

켈리의 신중함, 미국의 수많은 임산부와 아이 구하다

그러던 차에 유럽 각국에서 팔다리가 없거나 짧은
해표지증(혹은 해표상지증; Phocomelia Syndrome)을 가진 기형아들의 출산이 급증했다.
역학조사 결과 거의 모든 경우가 산모가 임신 중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당연하게 미 당국은 탈리도마이드 판매를 허가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8천 명이 넘는 기형아들이 태어났지만,
미국에서는 켈시 박사의 소신 덕택에 단 17명밖에 태어나지 않았다.
켈시 박사는 “서류를 깔아뭉갠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다”고 겸손해했지만,
미국 정부는 대통령상으로 그의 강직한 업무처리에 보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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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켈시에게 대통령상을 수여하는 장면

한국판 켈시 ‘공무원 이장덕’

‘이장덕’이라는 한국의 여성 공무원이 있었다.
소속은 화성군청 사회복지과였고, 하는 일은 유아ㆍ청소년용 시설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담당 계장으로 근무하던 1997년 9월, 관내에 있는 씨랜드라는 업체는
청소년 수련시설 설치 및 운영 허가를 이장덕에게 신청했다.
다중이용 시설 중에서도 청소년 대상이므로 철저히 안전대책이 마련되어야 함에도
실사 결과 콘크리트 1층 건물 위에 52개의 컨테이너를 얹어
2, 3층 객실을 만든 가건물 형태로 화재에 매우 취약한 형태였다.

이장덕의 소신, 묻히고 짓밟히다

당연히 신청서는 반려되었지만, 그때부터 온갖 종류의 압력과 협박이 가해졌다.
직계 상사로부터는 빨리 허가를 내주라는 지시가 계속 내려왔다.
민원인으로부터도 여러 차례 회유 시도가 있었고
나중에는 폭력배들까지 찾아와 그와 가족들을 몰살시키겠다는 협박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끝내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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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98년 화성군은 그를 민원계로 전보 발령하였고, 씨랜드의 민원은 후임자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씨랜드 측과 관련 공무원들이 앓던 이 빠졌다고 좋아한 지 1년도 채 못되어 씨랜드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였고
결국 19명의 유치원생을 비롯한 23명이 숨지는 참극으로 끝났다.

상식과 소신을 지켜주지 못한 사회의 비극

똑같이 소신에 찬 공무원이었지만 한 사람은 비극을 막고 다른 한 사람은 비극을 막지 못했다.
한 사람은 영웅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지만,
 
한 사람은 경찰에 제출한 비망록으로 동료들을 무더기로 구속시켰다는 조직 내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한 사람은 90세까지 근무한 후 은퇴하자 조직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하였지만
한 사람은 현재 무얼 하며 지내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그의 소신을 지켜주지 못한 죄를, 그가 일깨워준 교훈을 잊은 죄를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아이들이 대신 감당하고 있다.
 
우리가 뭐라도 해야 한다면 출발은 여기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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