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대, 일제강점기가 극에 달하던 시절
국민정서가 불안했던 그 시절에
한 시골에서 한 10대 초중반의 소녀가 시집을 가게 되었다.
당시 시골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부모에 의한 혼약.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 띠동갑이라고 할 정도로 20대 중반의 사내였고,
자연스럽게 얼굴 한본 못본 남정네한테 인생을 맡겨야 한다는게 억울했는지
결혼을 하지 않겠다며 소녀는 떼를 썼고
부모의 역정에도 방안에 틀어박힌채 도통 나오려 하질 않았다.
억지로 끌어다가 결혼을 시키면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다는 당시의 관념으로 인해 결혼은 차일피일 미루어지게 되었다.
마을의 뒷산 느티나무 거목 아래에서
소녀를 불러낸 남자.
부모가 맺어준 남자의 거친 인상에 소녀는 남자가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까 몸을 떨었다.
소녀가 자신을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에 남자는 등뒤에 숨겼던 것을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양복점에서 빌린 양복을 차려입고, 소녀에게 무릎을 끓은채 꽃다발을 내민것.
당시 시골 정서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아든 소녀에게
남자는 웃으며 비녀를 내밀었다.
결혼을 한 여성이 하게 된다는 비녀, 가난한 살림이었기에 옥비녀가 아닌 자신이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비녀였다.
여성에게 비녀를 내미는 것, 그것은 현재의 결혼반지와도 같은 의미였다.
자신의 거절에 화를 내기는 커녕, 꽃다발과 비녀를 안겨주며 결혼해주겠냐고 고백을 한 남자에게 소녀는 한눈에 반했고
며칠후, 소녀는 남자와 결혼을 했고,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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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50년대 6.25 전쟁 속에서 한강철교 폭발이 일어나고 무너져내리는 철교를 건너던 도중,
북한군이 바로 뒤에서 온다는 말에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서로를 밀치면서 만삭의 몸이었던 그녀가 다리에서 떨어져내릴뻔한 것에
그녀를 구하고 대신 다리 위에서 떨어져 내린 남자.
한강으로 떨어져내린 남자를 따라 자결을 선택하려 했던 소녀는 다른 사람들의 만류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피난행렬 속에서 자식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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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저희 증조 할머니이십니다. 당시 증조 할아버지는 마을에서도 공부를 잘하기로 유명해서 도시로 나가 유학을 할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결혼 이후에는 제법 돈을 벌어 풍족한 삶을 사시면서도 마을에 축제가 있으면 선뜻 자금을 내어주는 등
명망도 좋았다고 합니다. 또한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께서는 결혼하신 이후로 단 한번의 부부싸움도 하지 않으셨고,
도시로 나가 함께 살면서도 주변의 마을 (당시엔 아파트가 없었다고 하네요) 의 여성들이 증조할머니를 부러워할정도로
로멘티스트였다고..
일을 하던 도중에, 사장이 갑자기 한강철교가 폭발되었다면서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라고 말을 하고 나서야
당시 만삭이셨던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가는길에 그런 안타까운 사고로 목숨을 잃으셨다고 합니다.
증조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 우연히 증조할아버지가 일하시던 곳의 관계자분의 도움을 받아
증조할아버지가 모아둔 재산으로 남다른 부족함없이 할아버지, 고모할머니 들을 길러내셨습니다.
홀로 자식분들을 길러내셨던 증조할머니께선느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증조 할아버지가 주셨던 비녀를 꽂고 계셨다고 해요.
제가 5살때의 일이라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지금도 가족들끼리 명절이 되면 증조할머니께서 해주셨던 증조할아버지 얘기를 가끔 하는데
정말 멋진 분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오늘의 유머 '건전한 인간' 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