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헌신한 기업인도 있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맹호군’ 창설 주도, OSS 특수공작대원
유한양행 창업자인 고 유일한 박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후세 기업인들의 사표가 되는 인물이지만,
일제 말기 한때 독립운동에 열정적으로 투신했었다는 점에서도, 다른 기업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사업을 하던 유일한은 1926년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와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않은 국민만이 주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유한양행을 창립했다.
승승장구하던 유한양행은 태평양전쟁과 일제의 탄압으로 위기를 맞는다.
일제의 전시통제 및 수탈정책, 물자총동원 계획 등은 기업활동을 극도로 위축시켰고, ‘조선의약품 기업 정비령’과 군수공장
지정 등으로, 유한양행의 손발은 완전히 묶였다.
특히 일제는 유한양행을 미국계 회사라며 핍박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 간부사원 전원을 종로경찰서에 연행하기도 했으며,
‘양행(洋行)’이 적성적인 표현이라고 해서 상호도 유한제약공업으로 바꿔야 했다.
또 혹독한 세무조사로 끊임없이 회사의 목줄을 조여왔다.
당시 유일한은 미국에 있었다. 1938년 유럽과 남북미의 약업계를 시찰하고 수출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국했다가,
전쟁 발발로 미국에서 발이 묶인 것. 유일한은 남가주대학 경영학석사 과정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민족대회 개최를 주도했고, 1942년 8월에는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에 참석,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회장 이승만 및 캘리포니아 주지사 컬벗 올손의 축사를 대독했다.
또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미국 육군사령부로부터 허가를 받고 ‘맹호군’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기여했고, 위원회 기획연구부 위원장을 맡아 《한국과 태평양전쟁》이라는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특히 유일한의 항일 독립운동의 하일라이트는 미국 전략정보국(OSS·CIA의 전신)의 특수공작요원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OSS는 중국에서는 광복군을 훈련시켜 낙하산으로 국내에 투입시키는 ‘독수리작전’을, 미국에서는 ‘냅코(NAPKO)’작전을 추진했다. 냅코 작전은 재미 한인교포들로 특수공작대를 구성해 한국에 침투시켜 첩보수집 및 지하조직을 만들어 무장유격투쟁을 벌이게 하자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두 작전은 모두 허사가 됐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씨에 따르면, 공작원들 중 8명의 명단이 보안상 A부터 H까지 알파벳으로만 남아있는데, 이중 A가 유일한이다.
OSS 훈련책임자는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회사 간부들을 보다 투철한 한인 애국자들로 채웠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고, A에 대해 소개했다.
공작원들은 캘리포니아 산타카타리나섬에서 무기사용법, 폭파훈련, 낙하산침투, 비밀 먹 사용법, 독도법, 무전기술, 촬영법 등을 배웠다고 한다.
당시 50세의 나이에 이렇게 고된 특수공작원 훈련을 자원해서 받고, 자신의 회사도 무장투쟁에 기꺼이 바칠 각오를 했던 유일한은 기업인이기 이전에 애국지사, 독립투사였다고 할 수 있다.
교보생명그룹 창업자 신용호
독립투사 집안, 신갑범·이육사 따랐다
“일찍이 막막한 식민지시대 아버지, 형들
일제와 맞서 싸우는 동안 제대로 자랄 겨를 없이 (중략)
혁명가 신갑범, 시인 이육사 선생의 애국수행 길목
만나는 곳이 학교요, 만나는 이를 스승으로 삼은 사람”
고은 시인은 지난 2003년 교보생명그룹 창업자였던 고 대산(大山) 신용호의 추모식에서, 이렇게 읊었다. 이 추모시 중 상기 부분은 신용호의 소년·청년시절을 짐작케 한다.
신용호는 1917년 8월 광주에서 신성언의 6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남 영암의 사대부 가문으로, 부친은 한학자이자 애국지사였다. 맏형 신용국은 영암에서 발생한 소작쟁의 항일농민운동의 주동자로 낙인찍혀 투옥됐다. 또 셋째형도 일본 도쿄에서 항일학생운동에 가담, 체포됐다.
신용호는 어릴 때부터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목격하고,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자연 남다른 민족의식과 아울러 일제에 대한 증오심을 품었고, 나라 잃은 국민의 슬픔을 절실히 느꼈다.
부친과 형들의 항일운동의 여파로, 그는 향리인 영암을 떠나 목포로 이사해야 했고, 신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독학으로 한학을 공부해야 했다.
하지만 불타는 향학열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억누를 수 없었던 신용호는 20세이던 1936년 홀홀단신 만주로 건너간다.
열혈청년 신용호는 만주 다롄, 베이징, 북만주 목단강, 자무스, 중·소 국경지대 하이라얼까지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다롄에서는 뒤늦게 중학교를 다녔다.
이 시절 신용호는 집안 어른이자 애국지사였던 신갑범 선생의 도움으로, 시인 이육사 등 많은 애국지사와 교류했다. 신갑범은 독립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던 기록이 있고, 이육사는 유명한 저항시인이며 의열단, 조선군관학교 등에 가담했고 일제에 체포돼 베이징에서 1944년 순국했다.
이 두 지사의 지도로, 신용호는 민족관, 사회관을 확고히 형성하고 투철한 소신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 영향으로 그는 북경대학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학을 포기했다. 조국 광복이 라는 투쟁목표 앞에, 그저 학업에만 열중할 수는 없다는 실천적 가치관 때문이었다.
신용호는 그 시절에 대해 “나의 대륙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결단의 시절이었다. 내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 것도 그 시절이었으며, 그 결심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회고한 바 있다.
베이징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이듬해인 1946년 여러 애국지사들과 함께, 10년 만에 귀국했다.
순천향대학교 박광서 교수는 “대산 선생의 행동철학의 원류인 ‘무자기(毋自欺)’ 사상은 그가 만주에서 만나 정신적 지주로 섬기던 신갑범과 이육사 선생의 사상에서 전수한 듯하다”고 지적했다.
무자기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 스스로에게 정직한 것이다. 맹자는 “무자기의 수양을 가진 사람은 남과 다른 기개, 즉 대장부의 기(氣)가 있다”고 했다.
1958년 8월 국민교육 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을 위해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을 창업하고, 사업보국과 교육진흥에 진력한 대산 신용호.
그가 비록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기업철학과 가치관은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들의 정신, 바로 그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한킴벌리가 제지 사업을 하는것에 죄책감을 느껴 나무심기 운동을 지시한 유일한 박사
교보그룹은 얼마전 창업자인 신용호 회장이 작고 하면서 대한민국 사상 최고에 달하는
상속세 1338억을 자진 납세
재계 순위 19위에 불과한 교보그룹이 사상 최고 상속세를 한푼도 거르지 않고 납세하자
새삼 높은 도덕성으로 세인들을 놀라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