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원자폭탄들..
위는 꼬맹이 (Little Boy)이고, 아래는 뚱뚱이 (Fat Man) 입니다.
꼬맹이는 실험용과 같이 '우라늄' 원자폭탄으로 히로시마에 떨어졌고
뚱뚱이는 '플루토늄' 원자폭탄으로 나가사키에 떨어졌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히로시마는 (나가사키도 마찬가지이지만) 억세게 운이 나쁜 도시이다.
수많은 폭격 대상지 중에서, 처음으로 뽑힌 도시들에 속했고
그 도시들중 폭탄 투하 당시 육안 투하에 알맞게 날씨가 좋은 바람에 선택된 도시이다.
히로시마는 인구 30만이 넘는 당시로서는 일본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곳은 일본군 43,000 명이 주둔하고 있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원자폭탄 표적을 결정하기 위해서 미국은 '공격 목표 선정 위원회'를 만들었고
위원회는 최종적으로 최초 타격지를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타. 나가사키로 선정하였다.
마리아나 제도 티니언 섬..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는 태평양 사이판 위에 있는 티니언 섬에서 출격하였다.
티니언 섬에서 일본 본토 까지는 편도 2,400 km 이고,
왕복 비행시간은 총 13시간이었다.
티니언섬 미군 비행장..
위는 당시의 티니언섬이고 아래는 현재의 모습.
당시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공군기지였다.
1944. 7. 일본군에게 티니언 섬을 탈환한 뒤 일본 공격용 비행장을 건설하였다.
'에놀라 게이' B-29폭격기..
'에놀라 게이' 는 폭격기 조정사인 티비츠의 어머니 이름이다.
티니언 섬 구석에 자리잡은 비밀부대, 509 혼성대대가 원자폭탄 공격부대로 선정.
히로시마 원자폭탄을 싫은 폭격기는 '에놀라 게이' 였다.
폭격 당일 8. 6. 01:37 에 3대의 B-29 가 먼저 출격하였다.
3대의 폭격기는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로 각각 기상관측을 위한 편대였다.
날씨 결과에 따라 최종 폭격도시를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1시간 후 02:45 3대의 타격대가 출격..
한 대는 원자폭탄을 장착한 에놀라 게이. 한 대는 호위. 한 대는 사진 촬영을 위한 폭격기 였다.
원자폭탄 투하 1시간 전에서야 날씨가 가장 좋은 히로시마로 최종 결정..
히로시마 그라운드 제로 (ground zero, 폭심지)
8. 6. 월요일 아침 08:15:15 정각에 9,300m 비행고도에서 4,360 kg에 달하는 꼬맹이를 투하
투하 42초 후 꼬맹이는 고도 570m 에서 폭발.
꼬맹이는 원래 타격지점인 T 자형 다리인 아이오이바시 다리 ( 사진 22번 지점 ) 에서 약 200m 빗겨나서 폭발하였다.
히로시마 폭발 장면.
사진의 서명은 '에놀라 게이' 조종사인 티비츠 (Tibbets) 이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꼬맹이의 폭발력은 TNT 15,000 톤으로 측정
'에놀라 게이' 후미에서 찍은 버섯구름 사진
폭발 1초 이내 섭씨 6,000 도로 올라 그 화염 열 에너지로 1km 이내 인간의 오장육부를 증발시켜버렸다.
화염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화염에 이어 시속 320km 의 충격파가 들이 닥치고
충격파로 5만여 명의 목숨을 추가로 앗아갔다.
처음 몇 초 만에 대략 8만명 정도가 사망.
폭발 30분후 후폭풍이 시작되었다.
검은 비 (black rain) 도 내렸다.
원자폭탄으로 인한 히로시마 총 사망자는 14만 명이다.
폭발후 히로시마.
히로시마에서 원폭 폭발 16 시간 후 트루먼의 이름으로 그 사실이 발표되었다.
트루먼은 포츠담 회담을 끝내고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호를 타고 대서양을 통해 귀국 중이었다.
일본은 이 발표를 듣고 원자폭탄임을 알게되었다.
폭발 3일후 히로시마.
1945년 8월 당시, 히로시마에는 강제노역으로 끌려간 한국인이 약 53,000 명 정도 살고 있었다.
이들 중 25,000 명이 목숨을 잃었다.
8. 9. 목요일 12:02 나가사키에 뚱뚱이가 투하
나가사키도 당일 운이 나빴다.
원래 목표는 동북쪽으로 160 km 떨어진 고쿠라였으나, 그 도시는 짙은 구름에 가려있었다.
나가사키 폭발 장면.
뚱뚱이는 꼬맹이에 비해 1.5 배의 폭발력이었다.
일본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켰다.
이에 두 번째 원폭을 나가사키에 투하하였다.
나가사키 폭발 전(위) 과 후 (아래)
8. 8. 예전 얄타회담의 약속에 따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다음날 8. 9. 일본은 도쿄 엄폐호에서 일왕과 함께 최고회의를 가졌다.
회의 도중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8. 10. 새벽 3시에 일왕은 '무조건 항복' 을 선택.
그날 세 번째 공격용 원자폭탄을 미국 본토에서 인수하기 위한 비행기가 티니언 섬을 이륙하였다.
다음 번 표적은 도쿄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