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 1982년의 그 날, 사브라 샤틸라의 대학살

1982년, PLO의 이스라엘에 대한 미사일 공격이 더욱 거세지자,

이에 신물이 난 이스라엘은 이웃의 약소국 레바논에 군대를 주둔시켜

레바논 남부를 점령한 후 PLO의 미사일 기지를 완전히 제거해버린 후 완충지대를 만들 계획을 짜

1982년 레바논 전쟁을 일으킵니다.



(사진: 아리엘 샤론. 후에 이스라엘 수상까지 지냅니다.)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던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אריאל שרון) 은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까지 진입하였고,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도 민병대이자 정당인 카타엡당(팔랑헤당)과 손을 잡아서

레바논을 이스라엘의 사실상의 꼭두각시로 만들고 시리아를 견제하자는 계획을 구성합니다.

당시 미국은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표명했지만

샤론은 그에 법규↓를 날리고 베이루트로 닥돌합니다.


Logo of Kataeb Party.svg



Bachir While Giving A Speech.jpg

(사진: 카타엡당의 깃발과 바시르 게마옐)


당시 34세의 젊은 정치인이었던 바시르 게마옐(Bachir Gemayel, بشير الجميّل)은 야심가이자,

항상 민족, 종교간 분열 그리고 이웃 나라들의 간섭에 의한 내전으로 얼룩졌던 레바논의 현실을 완전히 바꾸길 원하는

일단은(?) 평화주의자였습니다.

PLO가 레바논 영토에서 슬슬 발을 빼고 레바논 전쟁이 중단되자, 그는 레바논 의회에서 차기 레바논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바시르는 마론파와 무슬림, 그리고 여러 소수 종파들을 두루 방문하면서,

레바논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다 줄 새로운 플랜을 짭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한 평화주의자로 보이겠지만,

문제점은 그가 레바논 소수 기독교인 마론파 신도이고,

친미, 친서방, 친터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친이스라엘적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Hafez al-Assad.jpg

(사진: 시리아의 대통령 하페즈 알 아사드, 그의 아들인 바샤르 알 아사드는 현재 시리아의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웃 강국이자 대표적인 반이스라엘파 국가인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Hafez al-Assad, حافظ الأسد)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도 마론파 신도였지만, 같이 레바논 전쟁에 참전한 입장에서 친이스라엘적인 바시르가 마론파의 맹주 노릇을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 동년 2월의 하마 대학살로 반대파들인 이슬람 과격파를 '증발'시켜버리고 입지를 단단히 다진 하페즈는

바시르를 제거해버리고 레바논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여들일 계획을 세웁니다.


결국 바시르 게마옐은 1982년 9월 14일, 시리아에 의해 고용된 하비브 샤르토니와

그의 상관이자 시리아 정보부 요원인 나빌 알람에게 폭탄 테러로 암살당합니다.


당연히 카타엡 민병대원들과 대다수 마론파 교도들은 분노했습니다.

일단 친이스라엘, 친미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의 평화를 만들려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것도 임기 9일을 앞두고 폭탄으로 사라졌고,

또한 바시르 게마옐은 젊은 피와 특유의 카리스마로 카타엡 민병대원들에겐 그야말로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기에,

분노한 그들은 모사드와 CIA에게 공동수사를 의뢰합니다.


조사한 결과, 이는 하페즈 알 아사드의 동생인 라파트 알 아사드가 정보원을 시켜 꾸민 일이라고 결론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왠지 암살의 주범이었던 하비브 샤르토니는 사건직후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습니다.

후에 바시르의 형인 아민 게마옐이 대통령에 오른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동생을 순교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슬픔에 차있던 아민의 의도도 있었지만,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레바논에게 샤르토니를 함부로 회부하지 말라고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이 사건때문에 계획에 엄청난 차질이 생겨버립니다.

바시르가 죽어버리면 레바논을 자신의 괴뢰국으로 만들 수 없기에, 눈엣가시인 PLO를 제거할 수 없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모사드에 의해 이 일의 배후에 시리아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혼돈이 온 그들은,

'아 모르겠다 일단 일터진 김에 팔레스타인 놈팽이들부터 때려죽이자!'하는 생각으로

이 폭탄 테러범의 소속이 PLO라는 정보를 카타엡당에게 줍니다.


분노에 휩싸여 눈앞에 뵈는 것이 없던 카타엡당은, 하다드나 SLA 등 같은 노선을 가진 민병대원들과 같이,

수천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던 사브라 샤틸라 캠프로 돌격했고,

이스라엘군도 현지 레바논군과 경찰에게

지금부터 일어날 일들을 묵인해달라는 정보를 보내고, 같이 사브라 샤틸라로 진군합니다.

그들은 그 곳에 PLO 기지가 있다고 굳게 믿었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PLO는 이미 레바논에서 떠난 뒤였습니다.

사브라 샤틸라에는 난민들밖엔 남지 않았죠.

운이 없게도 그들은 민병대원들이 자신들을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결국 9월 16일, 난민들에겐 지옥이 찾아옵니다.






9월 16일 오후, 이스라엘군은 중무장한 병사들과 전투용 차량, 군용 불도저 등으로 사브라 샤틸라 난민캠프 주위를 포위했습니다.

이후 200여명의 카타엡 민병대원들과 80여명의 하디드 등 기타 민병대원들이 차량에 나눠타고 사브라 샤틸라 난민 캠프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PLO 게릴라 색출을 명분으로 모든 남성들을 불러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모두 쏴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자비란 없었습니다.

일단 색출해낸 자들은 모두 죽였고,

여자와 어린이의 보호 따위는 그들의 뇌리에 없었습니다.

도망치는 자들도 끝까지 추격해 쏴 죽였습니다.

총알이 떨어지자, 그들은 단검과 도끼, 크로우바, 킬리지(중동식 장검), 오함마, 알루미늄 방망이 등 여러 냉병기와 공구들을 이용하여

난민들을 도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총보다 냉병기를 사용한 비율이 더 높아서,

학살 현장에는 총에 맞아 죽은 시체보다, 냉병기로 신체 일부가 절단된 시체가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로켓포와 수류탄으로 건물들을 파괴하여 사용 불능으로 만들었고

사람들을 버스나 트럭에 태워 통째로 불을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학살은 야간까지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군은 그저 방관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야간에 조명탄을 쏴 주거나

학살에 지친 카타엡 민병대들에게 물과 식량을 제공해주는등

공공연히 학살을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레바논 경찰들과 정부군, 그리고 현지 마론파 주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난민들의 도움 요청을 무시할 뿐이었습니다.

특히 일부 극우 마론파 교도들은 벌레들이 사라졌다면서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학살은 18일 오전 이스라엘군이 카타엡 민병들에게 '적당히 했으니 이제 그만 해라'라고 방송하면서 중단됩니다.

시체들은 며칠간 그대로 난민 캠프에 방치되었고,

난민 캠프에는 가족을 잃은 난민들의 통곡 소리만 가득 채워졌습니다.





이후 서방과 터키의 기자들이 사브라 샤틸라를 방문하여

이 참혹한 현장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당시 방문한 이들이 증언하기를

학살 직후의 사브라 샤틸라에서는 부녀자들과 아이들의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으며

참수된 목이 장대에 걸려있고 시체들은 곳곳이 훼손되어있었고

건물들의 벽면에는 이들을 조롱하는 그래피티들이 몇몇 보였으며

차량에 깔리거나 치이고 불에탄 시신들이 넘쳤다고 합니다.

이 학살의 희생자들은, 아직까지도 정확한 수가 집계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든 단체의 통계 수가 전부 달라서

대략 460~36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사건은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줬고,

덕분에 국제적인 관심이 모두 레바논에 쏠렸습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사실상 이 학살을 외면했습니다.

직접적인 원인 제공은 자신들이 했음에도 불구하고요.

그래서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얻은 것은?

국제적인 비난과 레바논 전쟁 재발이었습니다.

덕분에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명목상 반드시 참전해야 했고

각각 몇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레바논에서 퇴각해야 했습니다.

또한 레바논은 이후 내전이 완전히 종식된 2006년까지

'평화'라는 단어는 사전에서나 찾아볼수 있는 단어 취급을 받을 정도로

오랜 기간동안 전쟁의 공포 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 사건 이후 서방과 터키로부터 엄청난 비난이 쇄도했습니다.

이스라엘 국내에서도 여론이 크게 흔들렸고

이스라엘은 여론 무마를 위해 대법원장 이츠하크 카한을 내세워

카한 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학살을 분석했습니다.

카한 위원회는 분석 후 보고서를 내었고,

아리엘 샤론 총리에 대해 '자신의 책무를 망각한 자. 그는 카타엡 민병대들의 분노가 어떤 행동으로 이어질지 예상하지 않았다. 반드시 해임시켜야 한다.' 는 평을 내렸습니다.

심지어 미국의 헨리 키신저도 '이스라엘의 수치'라고 평했습니다.

당시 학살을 주도한 사람 중 하나이자 카타엡당 정보책임자인 엘리 호베이카는 이후 시리아 편으로 돌아섭니다.



Ariel Sharon Headshot.jpg

결국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은 사임해야했습니다.

그는 1983년 전쟁범죄 혐의로 미국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자신을 변호하며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망언을 쏟아냈습니다.

'유태인들은 학살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기독교도들이 학살을 저지릅니다. 나치도 그러하였고, 결국엔 기독교도들의 문제가 아닙니까?'

그는 그의 죄에도 불구하고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또한 이 학살이 가져다 준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레바논의 테러 단체이자 정당이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단체인

헤즈볼라입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지금까지도 학살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있죠.



사브라 샤틸라 학살은 주변 강국들 틈바구니에 낀 난민의 비극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으며,

단순한 분노에 휩싸여 섣불리 거행한 일이

어떤 파장을 가져다 주는지를 잘 보여준 일이었습니다.


현재 레바논에서는 2011년부터 분쟁이 다시 발발하여

평화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수 없는 상태입니다.

사브라 샤틸라 난민 캠프는 이후 재건되어

현재도 많은 난민들이 학살의 공포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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