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ch] 30년

이제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겨본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간단하게 쓰도록 하겠지만, 길어지더라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다소 비현실적인 요소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거짓인 부분은 하나도 없음을 밝혀둔다.

이 이야기를 읽고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자유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9년전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갓 고등학교를 입학한 꿈 많은 소녀였다.

내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입학해서 고등학교까지 같은 반이 된 친구들이 있었다.

한 명은 유키, 또 한명은 에이코,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다.
(이름은 가명으로 하겠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서로 관심사가 같았고 생각도 같아서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냈다.

그랬던만큼 서로서로가 정말 아껴주고 또 어려울 때 힘이 되어준 사이였다.

다른 친구들은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 당시 내 심정으로는, 우리 가족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그정도로 소중하게 여긴 사람들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맞이하는 첫 여름방학.

우리는 매년마다 그랬듯이 현내(縣內)의 해수욕장으로 놀러갔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온 방학행사 중 하나였다.

그냥 당일치기로 가서 놀고 오는 게 다였다.
 

그날도 우리는 뭐하면서 놀지 상의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일단 해수욕장에 도착해서 적당한 자리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나머지 친구들도 기분이 좋은 듯 깔깔대며 웃었다.

넘쳐나는 사람들의 모습과 움직임 하나하나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서로의 희망과 꿈을 확인했다.
 

어느정도 햇볕도 다 쬐고나니, 시원한 바다에서 수영이 하고 싶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수영을 하러 간다고 말했고, 유키와 에이코 중 에이코가 나와 함께 수영을 가고, 유키는 남기로 했다.

우리는 남자 아이들처럼 마구 물장구를 치고 서로에게 장난을 치며 놀았다.
 

한 30분 정도 지나니까 몸이 지치기 시작했다. 에이코도 지친 건지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도 에이코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에이코와 함께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데, 유키가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와 에이코는 처음보는 남자와 유키가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그냥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건 줄 알았다.
 
 
나 [유키! 이 사람은 누구..?]

유키 [아, 방금 만났어.. ㅎㅎ]

에이코 [아.. 그래? 안녕하세요.]

남자 [네.. 친구분이신가보죠?]

나, 에이코 [네..]
 
 
남자는 자신을 유스케라고 소개했다.

언뜻봐도 우리 또래정도로 보이는 외모. 그 이외에는 별로 특별한 점은 없었다.
 
유스케는 유키에게 귓속말로 뭐라 말한 후에 자리를 떠났다.

궁금해진 우리는 유키에게 물어보았다.
 

나, 에이코 [야. 저 남자 뭐야? 방금 만났다며?]

유키 [아.. 그게. 아까 전에 바람이 세게 불어서 돗자리가 날아갔거든.
       잡으러 가는데, 저 남자가 대신 잡아줘서.. 그러다 보니 이야기도 하게 되고..
       뭐, 아무튼 그래. 저 남자, 알고보니 우리 동네에 살더라. 우리랑 나이도 같고..]
 

유키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것인지 주절주절 얘기하기 시작했고, 나와 에이코는 그걸 군말 없이 듣고 또 들었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우리는 별 문제가 없었고, 나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유키가 유스케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해수욕장에 다녀오고 나서 7일이 지난 후였다.

솔직히 우리는 그동안 아무 것도 몰랐다.

아니 눈치조차 챌 수 없었다.

유키가 우리 몰래 유스케와 몰래 만나고 다닌 것을..
 

처음으로 둘의 모습을 본 건 에이코였다.

그날도 셋이서 각자 집으로 가려고 헤어지고, 집으로 가던 에이코.

그러다가 유키에게 빌려 준 학용품을 깜박하고 받지 않은 게 생각난 에이코가 급하게 유키네 집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유키네 집에 다왔을 무렵. 에이코는 유키와 유스케가 집 앞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는 유키에게 에이코가 본 것을 말했고, 유키는 자신이 유스케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그 날, 해수욕장에서 헤어진 뒤, 서로 전화로 통화를 하며 만나왔다고 한다.

우리가 수영을 하고 있던 그 30분여분간,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우리 셋은 전부 남자친구따윈 없었다.

물론 필요성도 못 느꼈고, 서로 남자친구따위 사귀지 말자고 약속도 했었고..
 

그런데 그 약속을 유키가 깬 것이다.

게다가 어이 없었던 것은 셋 중에서 솔직히 내가 제일 외모도 뛰어났고 남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받고 있었는데, 어째서 셋 중에서 가장,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유키가 제일 먼저 남자친구가 생긴 것인지..
 

바로 그것이었다.

절대로 질투가 나서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의 약속을 한치의 갈등도 안 하고 무시하듯 깨어버린 유키에게 실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실망 뒤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뒤따라왔다.

물론 에이코도 그랬었고..
 
 
그날부터 우리 사이는 서서히 멀어져만 갔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유키를 물 먹일 수 있을까 궁리했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유키에 대한 나의 증오심과 분노는 날로만 커져갔다.
 

못생긴 년이.. 불쌍해서 친구로 해줬더니..
 

그런 생각만이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에이코는 참지 못하고 분에 못이겨 책상을 쾅쾅 치는 게 예사였다.
 

물론 그럴수록 힘들어하는 건 유키였다.

유키는 항상 우리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며 말했지만, 우리는 그럴수록 유키에게 못되게 굴었다.

어쩔때는 대놓고 무시하거나 유키가 자리를 비웠을 때, 도시락에 분필가루를 넣거나 했다.

 
솔직히 말해서 유키는 나와 에이코에 비해서 많이 쳐지는 아이였다.
 

나와 에이코가 유키를 대하는 태도가 날로 차가워지면 차가워질수록 반 아이들도 하나둘씩 그 흐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두명씩 그러더니, 어느새 반 아이들 전체가 유키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한 한달간은 그렇게 괴롭힌 것 같다. 물론 여기서 끝난다면 여기서 끝이겠지만..
 
 
그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린 걸로 기억한다.

그래, 확실히 비가 내렸다. 어찌 그 날을 잊을 수 있을까.
 

그날도 우리는 어떻게 유키를 괴롭힐지 궁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에이코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길을 걷는데, 멀리서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랬다. 유스케였다.

그 순간 에이코는 그 자리에 딱 멈춰서더니 나에게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미친 생각같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최고의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아찔하면서도 짜릿한.. 어쩌면 그런 생각을 전부터 미리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와 에이코는 유스케에게 다가갔다.

유스케는 우리 얼굴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도 유스케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유스케였다.
 

유스케 [여어~ 안녕! 유키 친구들이지?]
 

솔직히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유키가 우리가 한 짓들을 말하지 않은 것인가?

멍청한 유키.. 네년은 착해서 문제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껏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에이코는 쿡쿡 웃고 있던 걸로 기억한다. 추악한 년..
 
 
에이코는 유스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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