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조선시대 괴담 12가지

1.
1500년대 말엽 즈음에 회자되던 사건 중에 
김위(金偉)의 아들이 유괴된 사건은 그 내용이 무척 이상하다.

김위는 개성에서 살고 있는 선비 였는데, 어린 아들이 유괴 당한다. 
아이를 유괴한 범인은 아이를 이런저런 술수로 속이고 유인해서 끌어 들여서 같이 길을 나섰는데, 
언덕과 비탈을 넘어서 깊은 산속으로 아이를 데려 갔다. 
그곳에서 범인은 아이를 어느 캄캄한 바위굴 속에 가둬 두었다.

아이는 나가고 싶어 울부짖었지만, 바위굴은 나갈 수 없게 막혀 있고, 
빛이 들어오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서움에 울고 떨고 소리를 지르면서 도움을 청하기도 했지만, 
깊은 산 속의 숨겨진 바위굴은 사람은 커녕 짐승들도 알아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혼자서 한참을 그렇게 
두려움에 떨던 아이는 계속해서 그렇게 했다가 지치게 되고, 점차 배고픔을 느끼게 되었다.

아이가 배고픔을 느끼게 되었을 무렵. 바위굴의 통로로 누군가 그릇을 하나 가져다 주었다. 
그릇 안에는 달콤한 단술과 비슷한 죽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배고픔에 떨던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 죽을 마셨다. 
그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굴 속에서 아이는 갇혀서 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아이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매일 아이에게는 그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음식 그릇 하나가 들어왔다가 나갈 뿐이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견디기 어려운 날에는 풀을 엮어 만든 이불 같은 것이 들어오는 변화가 있을 뿐, 
아이는 캄캄한 어둠속에서 말한마디, 빛 한 줄기 보지 못하고 갇힌 채로 계속 매일을 지냈다. 
그런 날들이 끝없이 계속 되었다.

아이가 발견된 것은 재령의 장수산에서 철광을 캐기 위해 
광산을 개발하고 있던 사람이 광산 개발을 위해 굴을 파다가 
우연히 아이가 갇혀 있던 바위굴을 뚫게 되면서 였다. 

굴을 파던 사람은 깊은 바위굴 속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아이를 구조했고, 
수소문 끝에 아이의 아버지인 김위는 아이를 되찾게 되었다. 
아이를 되찾고 나서 보니, 
아이가 아무것도 없는 굴 속에 갇혀서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채 
오직 매일 죽 한그릇씩만 먹으면서 계속 지냈던 시간은 무려 6년이었다.

아이는 몸은 그런대로 멀쩡해 보였지만, 정신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김위는 온힘을 다해서 아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집에서 노력했지만, 2년 후 아이는 죽었다.

도대체, 범인은 무엇 때문에 김위의 아들을 유괴해서, 
6년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 가둬둔 것일까? 
그리고, 6년 동안 도대체 무슨 사연인지 어떤 이유인지도 모르고 그 어떤 외부와의 접촉도 없이, 
하루 하루 끝없이 죽을 먹는 다는 행동만 반복하며 살았던 아이가 
끝없이 생각하고 느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 원본출전 어우야담


2. 
1500년대 중반 무렵, 두 선비가 다툰 일 하나가 용재총화에 기록되어 있다. 
성균관을 드나들며 공부하던 김윤량(金允良)과 김복창(金福昌)이 싸운 일인데, 
김윤량이 볼품 없이 먹을 것만 주섬주섬 챙기는 사람이라고 
비웃은 김복창이 김윤량을 심하게 조롱하기 위해 찬(贊)이라는 형식으로 글을 지어서 
김윤량을 놀린 것이 발단이었다.

김복창이 자신을 비웃는 것을 본 김윤량은 비슷한 방식으로 싸우기 시작했고, 
마침내 김윤량은 자신이 아는 점술에 대한 지식을 동원해서, 
"김복창은 일찍 죽을 것이다"라고 악담을 하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김복창은 판단력을 잃고 격노하여, 
불붙은 숯덩이를 찍어 들고 김윤량의 입 속에 짓이겨 넣어 버린다. 
타오르는 뜨거운 숯덩이가 입안에 들어온 김윤량은 괴로워 날뛰었다.

좀 더 높은 명망을 떨친 선비들의 또다른 싸움 이야기로는 이런 것도 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은 자신의 적인 김자점(金自點)과 
서로 정치판에서 세력 다툼을 치열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자점은 심기원의 헛점을 놓치지 않았고, 
마침내 심기원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형벌을 받게 되었다.

심기원은 형벌을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붙들려서 나무로 만든 형틀 위에 묶이게 되었다. 
심기원은 나무로 만든 매로 두들겨 맞은 뒤에 귀양을 가거나, 
아니면 참수형이나 교수형을 당할 것을 생각하며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관리들은 형틀 위에 심기원을 단단히 묶어 놓더니 
한쪽 다리를 커다란 칼로 내려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심기원은 깜짝 놀라서, "도대체 이게 무슨 형벌이냐?"고 물었고, 
그러자 형벌을 집행하려는 사람은 "김자점 상공께서 분부한 형벌이다."고 대답했다. 
곧 심기원은 다리 한 쪽이 잘려나갔고, 차례대로 나머지 다리와 두 팔도 잘려 나갔다.

심기원은 사지가 모두 잘려 나간 상태에서 피를 뿌리면서 나뒹굴게 되었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몸뚱이만 남아 신음하도록 한 뒤에, 
정신을 잃을 때 즈음 하여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이 그 형벌의 끝이었다. 
심기원은 형벌을 받으면서, 형을 집행하는 칼을 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대신해서 김자점에게 전해 주시오. 당신도 나와 같이 될 거라고."

심기원이 잔혹한 형벌의 희생양으로 이렇게 죽은지 7년후. 
정말로 공교롭게도 김자점 역시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같은 방식으로 처형되게 되었다.

이후, 이 형벌은 폐지 되었다.

- 원본출전 청성잡기


3.
1700년대 후반에 한 부유한 집에서 사치스러운 음식을 개발해 먹어서 널리 소문이 난 것이 있었다. 
그 음식은 바로 일종의 떡국이었는데, 국속에 들어가는 떡을 극히 교묘하게 만든 것이었다. 
귀여운 어린 아이의 모양으로 떡을 빚는데, 
눈 코 입 귀 피부를 어린 아이와 꼭 같이 정밀하게 만들고 팔과 다리 또한 진짜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이 음식은 눈으로 보기에 귀엽고 살아 있는 작은 사람처럼 생생하게 꾸미고, 
귀로 듣기에 국물 속에서 움직이고 국물이 스며들고 나올 때에 소리가 먹음직 스럽고, 
코로 맡기에 냄새가 향기롭고, 혀에 닿으면 맛이 오묘하고, 
어린 아이 모양의 떡을 이빨로 뜯어 씨입을 때 
입술과 잇몸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고 기분 좋게 만든 것이었다.

이 음식은 널리 소문이 났는데, 곧 이 사람은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음식 사치를 극도로 부리는 자는 망한다는 속설이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예로, 1651년 김자점의 가문이 망할 무렵 즈음에, 
김자점은 모든 음식이 씨입기에 단단하다고 투정을 부려서, 
오직 갓 부화한 직후의 병아리만을 구해다가 알에서 겨우 병아리로 변한 
그 직후의 상태로 요리하여 씨입어 먹었다고 한다. 

- 원본출전 청성잡기


4.
조선시대 뱃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속설 중에 
임산부가 배에 타고 바다에 나가면 안된다는 것이 있었다. 
당시에도 미신이라는 생각은 있었으나, 
바다를 다스리는 용왕이 물 속에서 임산부가 물 위에 올라와 있다는 것을 느끼면 
깨끗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화를 내면서 
큰 비바람을 불러 일으켜서 배를 빠뜨리려 한다는 생각을 믿는 사람은 많았다.

그래서 항해하는 도중에 위험한 바람과 파도를 맞이 하게 되면, 
뱃사람들은 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임산부가 없는지 확인하곤 했고, 
만약 임산부가 발견되면 다른 사람들을 살게 하기 위해서 배에서 뛰어 내리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식을 갖춘 선비들은 이러한 행동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는 겁에 질린 사람들은 모두 한 뜻으로 
임산부를 탓하며 몰아 붙이기 마련이었고, 
그러다보면 배에 탄 임산부는 몰린 끝에 물에 뛰어 들어 익사하곤 했다.

간혹 임산부가 없을 때에는 겁에 질린 사람들이 배를 탄 여자를 
아무나 임신했다고 몰아 붙여서 바다에 내던져 버리는 일도 있었다. 


5.
1623년. 평안감사로 재직한 적이 있던 박엽(朴燁)은 군대를 잘 관리하여 
그 명성을 떨치고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호기롭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는데, 
구름 모양으로 배를 꾸며 놓고 기생들과 악사들을 그 배에 태워서 
안개 낀 강에 배를 띄운채 뱃놀이를 했다. 
그렇게해서 물위를 떠다니면서 노는데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이 노는 듯한 흥취를 즐겼다. 

박엽은 또한 평양성 성벽 위에 환하게 횃불을 밝혀서 
밤에도 성벽이 낮처럼 밝게 빛을 뿜도록 장식해서 그 아름다움을 즐기기도 했다. 
박엽은 한편 새롭게 70간 규모의 극장 같은 것을 지어서 
평안도 내의 노래를 잘하는 가수 백여명을 모아 놓고 
그 안에서 밤새 노래를 듣고 춤을 보며 즐겼으며, 여러가지 음란한 놀이를 하며 놀았다.

그런데, 그러던 중 박엽은 한 외국인 주술사에게 
"사람 일만을 죽여야 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외국인은 점을 잘치는 것으로 매우 이름이 높은 자였으므로, 
박엽은 겁에 질려 떨게 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살릴 운명으로 가기 위해 부하들과 주민들을 하나 둘 처형하기 시작했다.

박엽은 1만명을 죽인다는 목표로 사소한 잘못을 한 사람들도 모두 사형을 시켰는데, 
애초에 엄한 벌을 내려서 군대를 다스린 사람인 만큼 군인들이 사소한 죄로 사형 시켰고, 
나중에는 자신이 놀고 즐기기 위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걷을 때, 
세금을 바치는 데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사형시키기 시작했다. 
박엽은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사형시키고 다녀서 점차 평안도 주민들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마침 조정에서는 김자점이 정권을 틀어쥐면서 반대 세력들을 처단하려 하고 있었으므로, 
김자점의 반대파였던 박엽의 혹독한 형벌 집행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결국 김자점은 박엽을 사형시키도록 하였다. 
박엽은 1만명의 사람을 다 죽이지 못해서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박엽에게 죽음을 내린 김자점이 스스로 이름 대신에 쓰던 자(字)가 바로, 
"일만(一萬)"이라는 이름이었다.

Author

Lv.99 유북지기  최고관리자
1,267,164 (100%)

등록된 서명이 없습니다.

유머게시판 베스트

글이 없습니다.

Comments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