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방(스압)


혜주가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지나서였다. 아파트 공용 주차장에는 이미 차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주차할 곳을 찾기 위해 혜주는 두 번이나 주차장을 돌았다. 결국엔 현관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끼어서 차를 주차할 수 밖에 없었다.



앞에 주차된 차의 뒤쪽을 아슬아슬하게 가로막아 차를 주차하면서 혹시 옆 차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내일도 아침 일찍 나가야 할 것이라 별 걱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새벽에 출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였다. 차에서 내려 현관까지 걸어오면서 괜스레 더 신경이 쓰였다.



피곤한 하루였다. 어젯밤도 브리핑 준비로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한 혜주였다. 하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피로였다. 수술도 그렇고 브리핑도 그렇고 막 전문의를 단 의사에게는 주어지기 힘든 기회였다. 과장의 절대적인 신임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어제 낮, 수술에 들어가기 위해 소독을 하고 있는 혜주에게 과장이 갑작스레 말을 던졌다.



"이 수술, 혜주씨가 집도하도록 해요."



"네? 제가요? 하지만 과장님께서 하시기로....."



"내가 혜주씨를 믿으니까 맡기는 거요."



"네....."



혜주는 약간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과장의 갑작스런 지시를 예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학병원에서 과장급에게 배당된 수술을 전문의가 대신 집도하는 것이 간간이 있는 일이었지만 이처럼 큰 수술을 맡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과장의 말이 떨어진 그 순간 혜주의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겸손 섞인 승낙이 아니라 자신감에 찬 쾌재였다. 얼마나 이런 순간을 기다렸던가. 어렵지만 그만큼 성공을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수술이었다.



폐암 중기, 이미 왼쪽 폐의 절반이 암세포로 뒤덮여 있는 환자였다. 폐동맥까지 거의 잠식해 들어간 암세포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동맥을 끊어 다시 이어야 하는 대수술이었다. 하지만 혜주는 이미 자신이 있었다.



혜주의 상상 속에서 그리고 꿈속에서 이런 류의 폐암 수술은 이미 수십 차례나 반복되었다. 때로는 맥박이 영으로 떨어져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환자가 벌떡 일어나 혜주를 쳐다보기도 했다. 혜주는 언제나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해서 꿈 속 환자의 얼굴을 직접 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혜주는 이미 그 꿈 속 환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혜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흐릿한 흑백 사진으로 밖에 만나보지 못한 아버지. 혜주는 꿈속에서 그 아버지를 수술하고 또 수술했다.



수술을 하는 내내 혜주의 손놀림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장조차도 혜주의 과감하고 정밀한 수술실력에 놀라는 눈치였다. 혜주는 꿈속에서 하던 대로 기계적으로 손을 놀렸다. 문득 대학 시절 한 젊은 가정의학과 교수가 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슈바이처나 대단한 의학자가 아니라 염가에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잘 훈련된 엔지니어이다."



교수의 말은 일반인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영세 의원의 부족을 지적한 것이었지만, 혜주는 이 말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다. 엔지니어..... 혜주는 자신이 물컹한 기계의 부속을 만지는 정비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될 수만 있다면 혜주는 F1경기에 참가하는 전문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특급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에서 몇몇 부서진 차들을 잘못 만져 영원히 못쓰는 차가 된다하여도 그로 인해서 최고의 엔지니어가 탄생할 수 있다면, 그러한 작은 희생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혜주의 무의식 속에는 자리잡고 있었다.  



4시간에 걸친 대수술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안경에 김이 서릴 정도로 공을 들인 수술을 끝내고 과장과 함께 수술실을 나선 혜주의 눈에 안절부절 환자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 가족들이 들어왔다. 가족들은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일어나 과장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어떻게 됐습니까?"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물론 차후 경과는 지켜봐야겠지만 일단 이번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과장은 마치 조산원이 '아들입니다!' 하는 소식을 전하듯 미소를 머금고 그들에게 수술 경과를 전했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흘렀고, 부인인 듯 보이는 아주머니는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 나오는 과장과 혜주의 뒤로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가 던져졌다.



'나의 성공이다!'



과장의 뒤를 따라 걸으며 혜주는 속으로 몇 번을 되새겼다. 이것으로 과장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이제 혜주 앞에 남은 것은 국내 최고의 외과의로 명성을 쌓아가는 일 뿐이었다. 현재 폐암 수술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라 불리는 과장마저도 언젠가는 혜주가 따라잡아야 할 목표였다.



"내일 브리핑도 혜주씨가 준비하도록 해요." 과장이 걸음을 늦추지 않고 말을 던졌다.



"네?"



혜주는 깜짝 놀라 물었다. 과장이 수술을 맡긴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번 지시는 은근한 야망으로 가득 찬 혜주로서도 정말 놀라운 말이었다. 브리핑을 혜주가 맡는다는 말은 이 수술이 공식적인 혜주의 집도 기록이 된다는 말이었다. 경험뿐만이 아니라 작게나마 명성을 쌓을 발판마저 마련되는 순간이었다.



"과장님...."



혜주는 차마 감사하다는 말도 알겠다는 말로 못하고 그 자리에 서 버렸다.



"혜주씨 실력이 있어 보여서 내 이러는 거요. 고마워 할 꺼 없어요."



과장은 늘 그렇듯 할 말을 하고 먼저 걸어가 버렸다. 혜주는 잠시 멍하니 섰다가 마침내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지나가는 간호사가 이상하게 쳐다보아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혜주는 함박 웃음을 띤 채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브리핑 준비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밤을 꼴딱 새며 연습을 하고 또 했지만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람이 죄다 모인 국내 최고대학의 부속 병원이니 칼날 같은 질문이 아니 들어올 리가 없었다. 혜주는 대학시절 줄줄 외운 해부학 기본서까지 꺼내 다시 읽으며 브리핑 준비를 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 정례 브리핑에서 혜주는 역시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수술 내용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지만 과장의 도움도 매우 컸다. 시종일관 혜주의 재능을 칭찬하며 브리핑 내내 우호적인 분위기를 주도해나간 것이다. 막 전문의를 단 혜주의 너무 이른 성공에 몇몇 이는 시기심 어린 눈초리도 보였지만, 과장의 절대적 신임 하에 혜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 없이 브리핑을 해 나아갔다.



".........이상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과장이 먼저 박수를 쳤다. 브리핑 룸 내의 외과의들이 따라 박수를 치고 과장이 또 한 번의 치하의 말을 했다.



"수고 많았어요. 혜주씨. 역시 훌륭하군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혜주는 과장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그것은 과장의 인정이 혜주의 앞날에 빛을 던져준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혜주가 진심으로 과장을 존경하는 까닭도 있었다. 과장은 국내 외과수술 방면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짧은 미국 유학시절도 있었지만 과장은 거의 모든 수술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성공시킨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혜주 역시 그가 성공시킨 여러 수술들을 전문의 과정을 밟는 내내 수 차례나 목격하였다.



물론 혜주가 과장을 존경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국내 최고대학 부설병원의 과장을 지내고 있을뿐더러 국립보건원 연구이사를 겸임하고 있으며 보건원 산하 폐암연구학회 회장을 지내고 있는 과장은 그야말로 국내 외과 의학계의 노른자위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청빈한 학문적 성공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혜주에게 과장은 가장 이상적인 표본이었다. 그러나 과장은 결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법은 없었다. 순순히 혜주와 같은 실력 있는 후학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만 보아도 과장의 인간됨은 이미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혜주의 몸이 오징어처럼 늘어졌다. 혜주는 집에 들어 가자마자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서 자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화장은 지우고 자야겠지? 어쨌든 오늘밤만은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푹 자리라 혜주는 다짐했다.



그러나 집 앞에 도착한 혜주는 뜻밖의 소포에 쏟아지던 잠이 달아났다. 노란 소포 포장 용지에 싸여진 상자에는 또박또박 보낸 이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경남 밀양시 밀양대학교 석진규."



주소를 읽어나가는 혜주의 얼굴에 놀라움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진규. 어린 시절 혜주와 한 동네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였다. 혜주는 얼른 들어가 소포를 열어보고픈 마음에 서둘러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열쇠 구멍에 열쇠를 맞추는 일조차 쉽지가 않았다.



딸깍. 문 따는 소리가 들리고 혜주는 허리를 숙여 소포를 들어올렸다. 뭐가 들었는지 약간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혜주는 소포를 들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2.


87년 여름이었을까. 혜주와 진규는 초등학교 4학년을 한 반의 회장과 부회장으로 지냈다. 둘은 전교 1, 2등을 다투는 사이였고, 다만 혜주가 여자라는 이유로 부회장에 낙점이 된 것이었다. 혜주는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불만이었다. 해서 진규와도 그다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로 반장과 부반장을 선임하게 된 날 혜주는 다시 부반장의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1학기 두 번의 시험에서 두 번 다 혜주가 아슬아슬하게 진규를 이겼지만, 담임선생님은 싫다는 진규를 억지로 반장의 자리에 앉혔다. 혜주는 그 날을 계기로 진규와 친하게 지내기로 결심을 하였다.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는 여자아이로서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체념도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반장 자리를 사양하는 진규의 조용한 성격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2학기 중간고사 성적이 발표된 날이었다.



"이번 중간고사 1등은 진규다. 평균 97.5점. 반장이 체면을 차렸구나. 자, 모두 박수!"



아이들은 박수를 쳤고, 진규는 성격답게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혜주는 4학년 들어 처음으로 진규에게 전교 1등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혜주는 0.2점 차이로 이번엔 2등이구나. 혜주에게도 우리 박수 한 번 쳐주자."



아이들은 또 한 번 부러운 섞인 박수를 쳤다. 진규 역시도 박수를 치며 혜주를 쳐다보았다. 혜주는 진규와 눈을 마주치며 입으로 '축 하 해!'라고 신호를 보내었다. 진규는 혜주의 입 모양을 읽었는지 '고 마 워!'라고 답을 해 왔다.



그 날 저녁 진규와 혜주는 늦게 학교에 남아 아이들의 받아쓰기 채점을 하고 있었다. 시골 학교엔 늘 그렇지만 선생님들이 과중한 업무에 치게 마련이고,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몇몇 아이들이 받아쓰기 채점과 같은 소소한 일거리를 도와주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경우는 전교 1등과 2등이 한 반에서 반장과 부반장을 맡고 있으니 더욱 믿고 잡일을 맡길 수 있는 것이었다.



창가로는 낮부터 뛰어다니며 놀던 아이들도 다들 집으로 갔는지 조용한 운동장의 풍경만이 들어왔다. 혜주와 진규는 창가에 책상을 붙여놓고 마주앉아서 채점을 하고 있었다.



진규가 먼저 자기 몫의 채점을 다하고는 붉은 색연필을 책상에 놓았다.



"많이 남았니? 도와줄까?"



1학기 중에도 이런 기회가 있었지만, 진규와 혜주는 서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워낙에 혜주가 차갑고 딱딱하게 굴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반의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편이 갈라져 크게 싸우는 일이 있었던 까닭에 그 분위기에 묻혀 서로 말을 주고받기도 어색했던 점도 있었다. 해서 1학기 내내는 누군가 먼저 채점을 끝내도 그냥 말없이 기다리고 있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의 혜주가 보낸 우호적인 메시지가 둘 사이의 서먹함을 없애버렸는지 진규가 먼저 말을 건네어왔다.



"잠깐만." 혜주가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몫의 시험지는 매겼다.



"나도 다 했어."



혜주와 진규는 색연필을 놓고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선생님 왜 안 오시지?"



"내가 가서 말씀드릴까?" 진규가 대답했다.



"그냥 기다리자. 좀 있으면 오시겠지."



"그래, 그럼 그러자."



선생님을 기다리는 둘 사이에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진규였다.



"혜주야. 넌 꿈이 뭐야?"



"꿈?"



"응. 커서 뭐가 될꺼야?"



"난 의사." 혜주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왜?"



"암을 고치려고."



"암?"



"응. 아버지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대."



"그렇구나. 안됐다."



"물론 난 아버지 얼굴도 못 봤어. 나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거든."



그 때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채점 다 했니?"



"네."



"그럼 그냥 거기 놓고 가거라. 수고했다."



"네."



"그래. 선생님이 좀 바빠서 그래. 미안하다. 다음에 선생님이 맛있는 거 사주마."



"네. 선생님. 안녕히 계셔요."



혜주와 진규는 가방을 메고 교실을 빠져 나왔다.



혜주가 진규에게 같은 질문을 한 것은 집으로 향하는 기나긴 둑길을 반 넘게 걸어왔을 때였다.



"진규야. 넌 꿈이 뭐야?"



"나? 글세." 진규는 한참을 고민했다.



"나도 의사." 진규의 대답이었다.



"의사? 왜?"



"혜주 너랑 같이 의사하면 좋을 것 같아서."



진규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순진했다. 그래서인지 혜주는 갑자기 진규가 마음에 쏙 들어버렸다.



"그래 우리 나중에 커서 같이 의사하자."



"그래."



노을지는 긴긴 둑길을 걸어가던 두 꼬마의 모습은 이미 20여 년 전의 추억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그 20년 중 10년은 서로 연락이 끊긴 채 각자의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혜주의 문 앞에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진규의 소포가 배달되었다.



혜주는 조심스럽게 가위로 소포의 포장을 뜯어내었다. 안에는 봉투에 든 편지 한 장과 드링크제 한 통이 들어있었다. 혜주는 얼른 봉투에 든 편지부터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혜주에게.


안녕? 잘 있었니? 이렇게 불쑥 소포를 보내서 놀랐지? 서로 연락이 끊긴지도 10년이 되어 가는 구나. 넌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의사가 되었다며. 우연히 네 소식을 듣게 되었어.



난 여기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있어. 산학 협동으로 얼마 전에 드링크제 하나를 개발했는데, 식약청의 허가도 떨어졌고, 이제 상품화하는 일만 남았어. 내가 연구하는 동충하초라는 건데, 암 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입증되었어. 너에게 이 샘플을 보내주고 싶었어.



네가 의사가 되어 암을 고치겠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 나도 함께 하기로 했는데, 결국 그렇지 못했지. 하지만 난 나대로 새로운 접근법을 찾았단다.



언제 한 번 서로 만나서 얼굴보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드링크 한 번 마셔봐. 다음에 다시 연락할게. 안녕.


                                                     석진규.


짧은 편지였다. 그렇지만 혜주에게는 어린 시절의 감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20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다는 진규의 소식이 어쩐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혜주 자신이야말로 아직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마저도 들었다.



혜주는 드링크가 든 박스를 열었다. 시중에서는 보지 못한 박스였다. 안에 든 병에는 딱히 상표도 붙어있지 않았다. 판매가 되지 않은 시제품인 것이 표가 났다. 다만 뚜껑에만 '冬蟲夏草(동충하초)'라는 글씨가 쓰여있었다.



혜주는 한 병을 따서 꿀꺽 마셔버렸다. 쌉싸름한 향이 시중에 파는 드링크 제품의 맛과 딱히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혜주의 휴대폰이 울린 것은 그 때였다. 가방 속에 든 휴대폰을 찾느라 혜주는 가방을 죄다 털어야 했다. 허겁지겁 휴대폰을 열어 전화를 받자 들리는 목소리는 과장이었다.



"혜주씨? 나 최과장이오."



"아, 네. 과장님. 이런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과장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좀처럼 긴장하는 법이 없는 과장의 목소리가 이처럼 들떠 있는 것과 이런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한 것을 보면 굉장히 중요한 일이 틀림없었다. 급한 환자일까?



"혜주씨. 지금 날 좀 도와줄 수 있겠소?



"과장님, 무슨 일이시죠?"



"전화로 말하긴 어려운 사안이오. 하지만 무척 중요해요. 꼭 혜주씨가 날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저야 과장님께서 부탁하신다면 언제든지 도와드려야죠. 지금 어디세요?"



"일단 병원으로 와주게."



"네, 지금 제가 병원으로 갈게요."



"고마워요. 혜주씨."



과장의 전화가 끊겼다. 혜주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더욱 궁금해 왔다. 혜주는 서둘러 백에서 꺼낸 물건들을 다시 쓸어 넣었다. 과장이 이토록 급하게 혜주를 찾을 만한 일이라면 한 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가방을 들고 문단속을 하고 나오면서 혜주는 주차에 대한 걱정이 퍽이나 쓸모 없는 걱정이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혜주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진규가 보낸 드링크의 뚜껑이 자신의 가방 속에 들어간 사실은 알지 못했다. 물론 그 뚜껑이 혜주에게 얼마나 큰 행운을 안겨다 줄 것인지 역시 혜주는 알지 못했다.

병원으로 운전해 가면서 내내 혜주의 머릿 속을 지나간 생각들은 과장의 부름에 대한 의문보다는 어린 시절 진규와의 추억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남녀학교로 갈리긴 했지만 시내로 통학을 하면서 늘 함께 다니곤 했던 기억들. 때로는 등교 시간에 늦어 진규의 자전거 뒤에 앉아가기도 했다.



시내로 나가는 길은 어린 시절의 그 뚝길을 지나야 했다. 그때까지도 그 길은 흙길 그대로여서 자전거 뒤에 앉아가려면 여간 엉덩이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



"야. 엉덩이 아파. 좀 천천히 가."



진규의 허리춤을 붙잡고 혜주가 소리를 치면 진규는 짓궂게도 더욱 속력을 높이곤 했다. 그러면 학교까지 가는 내내 혜주는 비명을 질러댔다.



혜주의 학교 앞에 자전거가 서자 혜주는 얼른 뛰어내리며 진규의 등짝을 두들겼다.



"야, 이 나쁜 자식아! 천천히 가라니까. 머리도 바람에 다 날렸잖아!"



진규는 늘 그렇듯 말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제 갈 길로 자전거를 몰고 가버렸다. 혜주가 멀어져가는 진규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공중에 주먹질을 해대고 있노라면 혜주의 친구들이 다가와서 둘의 관계를 놀리곤 했다.



"야! 김혜주. 또 남자친구 자전거 타고 학교 왔냐?"



"남자친구는 무슨 개코가 남자친구야! 내 저런 자식을 그냥 죽여버려야지. 에휴."



"야, 벌써 소문 다 났어. 밀양여고 1등이란 밀양고등학교 1등이랑 사귄다. 좁은 밀양 바닥에 소문 다 났어."



"소문은 무슨 소문이야! 얼른 가자. 늦겠다."



소문이 돌아도 혜주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진규와 나란히 서울대학교 의대에 진학할 꿈을 꾸고 있었으니까.



진규의 아버지가 쓰러지신 것은 대입을 석 달 앞두고서였다.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다가 갑자기 쓰러지신 진규의 아버지는 아르가 부러지신 것보다 더 큰 병을 가지고 계셨다.


폐암. 


혜주의 아버지에게 내려졌던 저주가 이번에는 진규의 아버지는 덮친 것이었다.



진규는 서울로 진학하겠다는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과수원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결국 진규는 밀양에 있는 대학교의 농과대학에 진학하기로 하였다.



마을 뒷산에서 진규와 혜주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혜주 네가 내 몫까지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의사가 되어줘."



진규의 그 말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혜주의 귓가에 맴돌았다. 혜주는 그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운명이란 언제나 사람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곤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날 혜주와 진규는 말없이 손을 잡고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20년을 한 동네에 살면서 친구처럼, 철이 들면서 때로는 연인처럼 지내온 둘이었지만 그렇게 손을 잡고 있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도 서로 연락하면 되지 뭐."



진규는 그렇게 말했고, 혜주도 반드시 그러리라 다짐했지만 결국 대학에 진학하고부터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혜주가 어머니와 함께 완전히 서울로 이사를 해버렸고, 다시 고향에 내려갈 일이 없어져버린 탓이었다.



의과대학에서의 일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하루하루 감당해야 할 공부에만 신경을 쓰기에도 역부족이었다. 레지던트 시절 어머니마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자 혜주는 누구보다도 외로웠지만 진규를 떠올리지는 않았었다. 하루 두어 시간도 채 못 자는 생활의 반복이었고, 혜주는 어머니의 죽음도 외로운 자신의 신세도 위로할 새 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쳐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최고의 의사가 되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를, 그리고 진규의 아버지를 앗아간 그 병마를 정복하고 말리라. 혜주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과장의 뜬금없는 부름에도 군말 없이 이렇게 지친 몸을 병원으로 옮기는 혜주에게는 나름대로의 그러한 계산이 있었다. 당분간은 과장의 뒤를 열심히 쫓으면 폐암연구소 쪽으로 길을 뚫을 수 있을 법도 했다. 혜주에게 필요한 것은 뛰어난 외과의로서의 명성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의 연구를 할 수 있는 계기였다.


병원으로 향하는 도로는 새벽이라 텅텅 비어있었고, 무심히 가속기 폐달에 발을 얹어놓은 혜주는 금방 병원 정문에 도착했다. 차단기는 내려져 있었고, 수위 아저씨는 유리로 된 칸막이 안에 앉아있었다. 병원의 밤풍경에는 그다지 급박한 상황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혜주는 운전석 창문을 열고 수위 아저씨에게 얼굴을 내보였다. 평소 같으면 말없이 차단기를 올려주었어야 할 수위 아저씨가 어쩐지 차단기를 올리지 않고 칸막이 밖으로 걸어나왔다.



"아저씨. 저예요. 차단기 좀 올려주세요."



혜주의 말을 듣고도 아저씨는 그대로 차단기 밖으로 걸어나오더니 저쪽 건너편 어딘가로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아저씨가 손짓하는 곳을 보니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명의 사내가 혜주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김혜주씨 되시죠?" 사내 한 명이 혜주에게 물었다.



"그런데요? 누구시죠?"



혜주는 약간 의아해하며 물었다. 사내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보였다.



"기관에서 나왔습니다. 최태식 과장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과장의 지시로 나왔다면 정말일 것이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혜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혜주를 병원으로 부른 과장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할 테니까.



"내려서 저희 차로 가시지요."



"어딜요?"



"여기서 말씀드리기가 약간 곤란합니다. 가셔서 이야기하시죠."



혜주는 약간 꺼림칙했지만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차는 키를 꽂아둔 채로 수위 아저씨에게 맡겼다. 수위 아저씨는 혜주의 차를 주차시키기 위해 차단기를 올렸다. 헤주는 슬쩍 수위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저 사람들 누구예요?"



"몰라, 나도. 그냥 오더니 혜주 선생 기다린다고 오면 이야기 해 달라고 하더라구. 내가 이 시간에 혜주 선생이 여기 왜 오냐고 하니까, 그냥 올 꺼라고 하더라고."



혜주는 그들을 따라 약간 걸어갔다. 그 곳에는 검은 고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사내 중 한 명은 운전석에 타고 혜주와 나머지 한 명은 뒷좌석에 탔다. 어쩐지 연행되어가는 피의자가 된 기분이었다.



차가 한참을 달렸다. 밤이라 밖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도심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혜주는 어쩐지 위압적인 차 안 분위기에 눌려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인지 묻지를 못했다.



한 시간이나 달렸을까. 혜주는 마침내 입을 열어 물었다.



"지금 도대체 어딜 가고 있는 거예요? 좀 알고가고 싶네요."



"사실 저희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저희도 지시 받은 대로 김혜주씨를 모셔가는 것뿐입니다. 일단 가시면 모든 설명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안 들으니 못한 대답이었다. 혜주는 여전히 창 밖을 기웃거리며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짐작을 해보려고 했으나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윽고 차가 속력을 줄이고, 앞에는 겹겹히 바리케이트가 쳐진 모습이 나타났다. 게다가 바리케이트 앞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줄줄이 서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혜주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을 든 군인 한 명이 차 앞을 가로막고는 운전석 옆으로 다가왔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사내가 짙게 썬팅된 창문을 열자 군인은 황급히 경례를 붙였다. 그리고는 차를 통과시켰다.



차를 겹겹히 둘러쳐 진 바리케이트를 꾸불꾸불 피해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지나가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한 채가 보였다. 그리고 주위로는 수풀이 울창했다. 뭔가 은밀한 시설임이 분명했다. 도로가 비탈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산 중턱 쯤 되는 것 같았고, 숲이 우거진 한 가운데 있는 이런 시설은 분명히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는 군사시설이 틀림없었다. 과장이 이런 류의 기관과도 친하다는 사실에 혜주는 속으로 두려운 섞인 찬탄을 터뜨렸다.



건물 현관에는 군복을 입은 중사 한 명이 마중을 나와있었다. 혜주가 탄 차가 현관 앞에 서고 혜주와 두 사내가 내렸다. 두 사내가 중사를 향해 경례를 붙이는 걸로 보아서 두 사내도 군인인 듯 했다. 중사는 군인 특유의 딱딱한 말투로 혜주를 맞았다.



"김혜주씨, 어서 오십시오."



"네. 여기가 어딘지?"



"일단 들어가시죠. 최태식 과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혜주는 중사를 따라 기나긴 복도를 걸어들어갔다.


4.


복도는 차갑고 길었다. 페인트가 칠해진 벽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다. 복도 천장 한가운데로 줄지어 달린 형광등은 약간은 어둡게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걸어가는 내내 좌우로 철문이 보였지만 푯말이 달린 문은 하나도 없었다. 무슨 은밀한 작업을 하는 곳인지, 내부 인사들도 자신의 사무실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침내 복도 끝에 있는 철문으로 중사가 혜주를 안내했다.



"이 쪽입니다."



"네."



중사는 문을 열면서 경례를 붙였다.



"충성. 김혜주씨 도착했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안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과장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중사는 몸을 돌려 혜주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혜주가 들어선 그 곳에는 커다란 원탁에 과장과 소령 한 명,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혜주의 자리인 듯 과장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혜주를 안내했던 중사는 혜주를 들여보내고는 밖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중사의 돌아가는 발걸음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방안의 방음은 철저했다. 혜주는 그 순간에도 군대란 곳이 참으로 분업이 철저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병원에서 여기까지 혜주를 데려오는 사람이 있고, 현관에서 이 곳까지 혜주를 데려오는 사람이 또 따로 있고, 여기서 이렇게 혜주를 맞는 사람도 또 따로 있다니. 이런 철저한 분업이 군대의 모든 사무에 통용되는 원칙인지 아니면 이번 사안이 워낙에 보안을 요하는 사안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김혜주씨, 앉으시죠."



소령은 혜주에게 명령 아닌 명령조로 말했다. 혜주는 자리에 앉으면서 옆에 앉은 과장에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과장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설명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소령이 혜주의 말을 받아채며 말했다. 혜주는 머쓱해져서 소령을 주목했다.



"일단 서로가 서로를 좀 알아야겠죠? 여기 계시는 분들은 이미 서로 인사를 하셨지만, 지금 오신 혜주씨를 위해 다시 소개를 하죠. 우선 저는 육군 본부 소속 이완규 소령입니다. 맡고 있는 일은 화생방 담당입니다."



소령은 혜주의 맞은 편에 앉은 파란 점퍼를 입은 40대 중반의 남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계시는 분은 국립과학수사 연구소 부검팀장 박상호 씨입니다. 현재 국내에서는 최고의 법의학 실무자라고 할 수 있지요."



소령은 다시 혜주와 소령의 사이에 앉은 검은 코트를 입은 30대로 보이는 남자를 소개했다.



"이 분은 보건복지부 산하 전염병 대책 위원회 실무위원 김기수 씨이십니다. 비상시 각종 행정상의 대책을 마련하시는 데는 최고라고 들어 저희가 모셨습니다. 그리고 모두 아시다시피 최태식 과장님은 국립 서울대학교 부설병원 외과과장님이시며 폐에 관해서는 국내에서 가장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신 김혜주 씨는 최과장님께서 특별히 추천하신 외과전문의이십니다."



혜주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소개에서 이미 뭔가 감을 잡았다. 전염병, 폐, 부검. 간단했다. 폐와 관련된 전염병이 발병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소령이 말을 이었다.



"일단 지금부터 간략하게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소령은 손에 쥔 작은 리모컨을 눌렀다. 그러자 방안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는 혜주의 맞은 편 벽으로 빔프로젝트가 쏘아지면서 사진이 나왔다. 혜주는 그 쪽 벽이 스크린이었다는 사실조차 처음 알았다.



스크린에 나타난 사진은 끔찍했다. 일렬로 뉘어진 시체들. 흙바닥에 뉘어진 시체들은 농촌 아주머니 아저씨들로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었고, 사진 끝으로 군화가 살짝 비쳤다. 소령이 다시 버튼을 누르자 다른 시체 사진들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끔찍했다.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진도 있었고, 그냥 죽어있는 사진도 있었다. 얼굴색이 푸르딩딩하게 변한 걸로 보아서 호흡곤란으로 죽은 사람을 연상시켰다. 네 번째 나온 갓 죽은 어린아이의 사진은 더욱 소름이 돋았다.



"상황 발생 지역은 강원도 곡성군의 진수 마을이란 곳입니다. 지금까지 마을 주민 24명 전원이 사망했고, 사인은 모두 호흡곤란을 수반한 폐출혈입니다. 전염병인지 아니면 모종의 테러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습니다. 지역은 준 군사지역인 관계로 현재 군에 의해 봉쇄되어있습니다."



"전염병이라면 사체를 수습한 군인들 중에서도 희생자가 있을 텐데요." 보건부 관리의 말이었다.



"네. 군에도 희생자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동일한 증세로 두 명이 사망했습니다."



"감염의 의심이 되는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문제는 감염의 증상 없이 바로 사망한다는 점입니다. 발병한지 5분 이내에 사망했습니다. 징후 따위는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화학 혹은 생물학적인 테러였든 전염병이었든 징후가 없다니요." 보건부 관리의 예리한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그 점이 저희로서도 의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앞으로 여러분들이 내려주셔야 합니다."



"저희가 현지로 파견되는 겁니까?" 부검팀장이 물었다.



"물론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빠지시고 싶으신 분은 지금 빠지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이 사안이 워낙에 민감한지라 모종의 조치가 가해질 겁니다."



"모종의 조치라면"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이 사태가 전염병에 의한 것일 경우입니다. 이 병이 전국으로 확산될 경우 국가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지난 중국에서 발병한 전염병의 경우에도 중국 경제는 거의 마비지경에 이르렀죠. 다행히도 이번 사태가 제한된 지역 안에서 벌어졌고, 게다가 그 지역이 준 군사지역이라 군에 의한 은밀한 통제가 가능한 실정이지만, 앞으로 사태가 확산된다거나 이 정보가 외부로 새어나갈 경우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들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 경제가 뿌리 채 흔들릴 우려도 있습니다. 현재 정부는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종의 조치라는 것이 감금이군요."



"격리라고 해 두죠. 지금 작전에서 빠지시더라도 사태가 끝날 때까지 현재 계신 이곳에 격리 수용되실 겁니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 참여하셔서 사태가 성공적으로 수습된다면 여러분에게는 파격적인 보상이 제공될 겁니다."



"하지만 전염병에 걸려서 죽어버리면?" 부검팀장의 말이었다.



"그럴 경우에도 유가족에게는 응당의 보상이 제공될 겁니다. 국가는 현재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소령의 마지막 멘트는 진부하기 그지없었지만 다들 선뜻 거절하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난 참여하겠소."



먼저 말을 꺼낸 건 과장이었다. 과장의 성품다웠다. 과장은 말을 마치고 먼저 혜주를 쳐다보았다. 혜주는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된 이상 과장을 믿고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네. 저도 가겠어요."



혜주로서는 의사로서의 마땅한 희생 정신 이외에도 뭔가 계산된 바가 있었다. 성공리에 일이 끝났을 경우 국가가 제공해 줄 수 있는 파격적인 보상. 사안이 이토록 보안을 요하는 것이라면 일이 끝나고 난 후에도 참여했던 사람에게는 입을 막기 위한 조치가 필요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혜주 쪽에서 칼자루를 쥐는 셈이었다. 어떤 보상이든, 그것이 금전적인 것이든 개인의 지위에 관한 것이든 혜주가 원하는 만큼의 보상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살아서 돌아왔을 때의 일이지만.



"우리의 임무라는 게 가서 병의 확산을 막는 겁니까 아니면 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겁니까?" 보건부 관리가 확인하듯 물어보았다.



"당장은 발생지역이 고립된 까닭에 다른 지역에서 전염의 사례가 보고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로써는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주임무라고 해야 겠군요. 그러나 확산이 되고 있다는 증거가 나오면 병의 확산을 막을 방도도 생각을 해 주셔야 합니다."



소령의 대답을 듣고서 보건부 관리는 잠시 망설였다.



"나도 가겠소." 보건부 관리가 결국 세 번째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렇다면 나도 가긴 가야겠소만, 우리가 처음으로 파견되는 겁니까?" 부검팀장의 조심스런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소령의 대답이었다.



"그럼 아직 부검도 이루어지진 않았겠군요."



"네." 소령은 부검팀장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을 했다.



"그럼 다들 승낙을 하신 것으로 알고 바로 출발을 하도록 하지요."



"지금 바로 가나요? 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전 아무 것도 챙겨온 것도 없어서."



혜주가 갑작스런 출발이라는 말에 놀라 대답했다.



"필요하신 모든 것은 말만 하시면 현지로 조달될 겁니다. 일어나시죠."



네 명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갑작스런 출발이었지만, 사태의 긴박함으로 미루어보아 늦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혜주는 오늘밤도 꼬박 새어야 한다는 사실이 약간은 부담스러웠다.



"참. 아직 말씀을 안 드렸군요. 이번 사태의 작전명은 '붉은방'입니다. 이는 작전지역을 일컫는 음어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작전에 투입되는 여러분은 음어로 '붉은손'이라 불리게 될 겁니다. 최연장자이신 과장님께서 '붉은손 둘'이 되셔서 팀장을 맡아주십시오. 그리고 나이순으로 박상호씨께서 '붉은손 셋'으로 불리실 꺼구요, 김기수씨께서 '붉은손 넷', 그리고 김혜주씨께서 '붉은손 다섯'이 됩니다."



소령이 함께 일어나며 넷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길로 혜주 일행은 지체없이 '붉은방'으로 향했다.

건물 앞에는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령과 일행은 승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에는 부사관 한 명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승합차는 다시 꼬불꼬불 바리케이트 사이를 뚫고 도로로 빠져나갔다.



혜주를 비롯한 네 명은 말이 없었다.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아마도 혜주의 머릿속과 별반 다르진 않을 것이었다. 과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하고 있는 일인가? 여기서라도 그만 빠지겠다고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라도 감염이 되어 죽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 길이 이승을 달리는 마지막 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사태의 원만한 수습 뒤에 주어질 엄청난 보상에 대한 기대들로 가득할 것이었다. 부검팀장이라면 경찰 고위 간부직으로 승진할 수도 있을 것이요, 보건부 관리는 좀더 편한 부서의 장으로 승진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혜주 역시 보건부의 폐암연구소에 평생 연구직을 보장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과장은? 과장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선뜻 이 일에 자원한 것일까? 혜주는 궁금증이 일었다. 과장 정도라면 이제 더 이상 뭔가를 얻기 위해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지 않아도 충분한 정도의 명성과 지위를 가지지 않았는가?



혜주는 과장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아마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지키는 몇 안되는 진짜 의사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혜주는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 나라에서 그런 희생 정신에 불타는 의사가 저토록 높은 지위까지 오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혜주는 언젠가 허준의 이야기를 읽은 생각이 났다. 혜주의 고향 밀양에 있는 얼음골에서 허준이 스승 유의태를 해부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정사에 따르면 사실은 아니라고 하지만, 암을 연구하는 데 자신의 몸을 제자에게 맡겼다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 그리고 스승을 해부한 제자 허준. 그런 의사들이 요즘 세상에도 있을까.

Author

Lv.99 유북지기  최고관리자
1,267,164 (100%)

등록된 서명이 없습니다.

유머게시판 베스트

글이 없습니다.

Comments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