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농구 역대 최고의 득점력은? '허재 VS 이충희'

이충희 vs 허재
허재 1965년 9월 28일
188cm 88kg
전 기아자동차
최연길 src=
VS
이충희 1959년 11월 7일
182cm 79kg
전 현대전자
서민교 src=
  • 코멘트 src=

    허재 src=

    ▷ 허재가 기억하는 최고의 순간 "기억에 남는 순간이 너무 많아 꼽기가 힘들다. 그래도 꼽는다면 기아 시절 94-95 농구대잔치 삼성과 결승전에서 마지막 5분 정도를 남겨놓고 혼자서 17점을 연속으로 넣어 우승했던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중앙대 시절 75점이나 대표팀에서 62점 넣었던 것은 하위 팀들과 했던 경기였기 때문에 기록에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 프로에 와선 97-98시즌 현대와 챔프전에서 졌는데도 MVP를 받아 기억엔 남는데, 우승하고 받았으면 더 좋았을 거다"

    ▷ 이충희가 본 허재 "허재가 농구는 정말 잘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힘의 농구를 했었다. 허재가 들어오기 전에는 선수들이 잔기술을 이용한 기술 농구를 많이 했었다. 하지만 허재는 기술적인 면도 뛰어났지만, NBA나 유럽농구처럼 힘이 있는 농구를 했기 때문에 굉장히 두드러졌다. 나보다 뛰어난 기량의 선수였고, 어느 자리에서나 잘할 수 있는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였다"

    ▷ 강동희가 본 허재 "허재 형은 외성적이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싫고 좋음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성격이다. 이러한 성격이 농구코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농구의 모든 기술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준 선수다. 전무후무할 정도의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최고의 선수다. 또한 승부욕이나 코트에 서면 지기 싫어하는(누구를 막론하고) 성격은 허재 형을 최고의 선수로 만들었다. 농구기술적인 면에서 거의 아시아 선수로 봤을 때 최고의 기량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이충희 src=

    ▷ 이충희가 기억하는 최고의 순간 "여러 번이 있었다. 보람을 느낀 것은 뉴델리 아시안게임 때였던 것 같다. 그 전에 대표 생활도 쭉 하고 그랬지만 우승의 문턱에서 중국에 져서 항상 2위 자리에 머물러 있었는데 드디어 그 벽을 허물었던 순간이다. . . . . . 이 대회에서 난 평균 30득점 정도를 하면서 전체 득점 랭킹 2위를 했었다. 선수생활 하면서 처음으로 60득점을 기록했던 순간도 기억난다. 84-85 농구대잔치 중앙대와 1차 결승전이다. 그 전에 50점대는 많이 기록했었는데, 60점을 넘긴 것은 처음이다"

    ▷ 허재가 본 이충희 "충희 형은 슛에는 정말 일가견이 있는 선수였다. 아직까지 충희 형만큼의 스피드와 슛 정확도를 가진 선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고 본다. 나도 현역 시절 충희 형을 수비하기는 정말 힘들었다. 슛의 정확도 자체도 워낙 좋았지만, 스피드와 타이밍이 정말 좋은 최고의 슈터였다"

    ▷ 박한 전 고려대 감독이 본 이충희 "이충희를 흔히 슛의 천재라고 하지만 그건 당연히 알려진 얘기다. 내가 본 이충희는 슛 외에도 뛰어난 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공격에 걸맞게 수비가 정말 뛰어난 선수였다. 순발력과 스피드가 뛰어나 상대 공격수가 애를 먹었을 정도로 수비가 강했다. 이충희는 공 없는 움직임이 정말 좋았다. 오히려 가드에게 어시스트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할 정도로 수비를 따돌리는 능력이 탁월해 이충희에게 패스가 가면 무조건 어시스트가 될 정도였다. 슛이 전부가 아닌 공·수의 양면성을 모두 갖춘 선수였다"
  • 왜 최고인가?

    허재 src=

    누군가 '허재가 왜 최고인가'라고 묻는다면 '허재가 왜 최고가 아닌가'라고 반문하고 싶다.

    허재는 최고다. 허재는 최고였기 때문에 허재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허용될 수 없는 '농구대통령', '농구9단', '농구천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허재는 대한민국 농구 역사상 아니 아시아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고 아직도 농구팬들과 농구인들은 '제2의 허재'를 기다리고 있다.

    188cm의 가드로는 좋은 신장, 왼손잡이, 긴 슛거리, 화려한 드리블, 폭넓은 시야, 높은 점프력과 뛰어난 순간 스피드까지... 허재는 최고의 득점원이 갖춰야할 모든 것을 갖췄다. 스스로 득점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고 공이 없을 때는 스크린을 돌아 나오거나 빠른 컷인으로 득점을 올릴 수도 있었다. 속공이면 속공, 하프코트 오펜스면 하프코트 오펜스까지 허재는 득점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언제든지 득점을 올릴 수 있었다.

    허재는 대학 4학년이던 1987년 대학농구 연맹전 단국대와의 경기에서는 전반전 중앙대가 올린 54득점을 혼자 올리며 한 경기 75득점을 올렸다. 또한 1990년 세계선수권대회 이집트와의 경기에서는 62득점을 올리며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세계선수권대회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도 세웠다. 다시 말해 그는 국내무대 뿐 아니라 국제무대에서도 검증된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득점원이었다.

    허재의 나이 33살이던 1997년 KBL이 출범해 프로 데뷔는 늦었지만 8시즌 동안 그는 12득점, 3.2리바운드, 4.3어시스트라는 좋은 기록을 남겼다. 그가 있었기에 중앙대학교는 대학무대를 휩쓸었고 그가 있었기에 기아산업 농구단은 농구대잔치시절 왕조를 만들었다. 미국에 마이클 조던이 있었다면 대한민국에는 허재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있었기에 농구는 1990년대 명실상부한 최고 인기스포츠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충희 src=

    "난 무협지에서 도사들이 경공으로 담을 넘어 다닌다는 것을 믿는다. 실제로 슛의 경지에 올랐단 느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손끝에 느낌이 온다. 눈을 감으면 마치 눈을 뜬 것처럼 림이 보이고, 림이 축구 골대처럼 커 보이기도 했다. 잘 들어가는 게 당연했다." 1970~90년대 한국농구 최고의 슈터 이충희가 직접 회상하며 한 말이다. 이충희에게는 슛에 관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슛에 있어서는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서 대만에서 붙여진 별명이 ‘신사수’다.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슛도사’로 불린다. 故김현준에게 대표팀에서 슛을 가르친 것도 이충희였다.

    182cm, 79kg. 농구선수로서는 아담한 체격이다. 하지만 이충희는 모든 핸디캡을 근성과 기술로 승화시켰다. 송도고 진학 당시 하루에 슛 1,000개씩 1년을 쉬지 않고 연습했다. 1,000개는 슛을 던진 숫자가 아닌 넣은 숫자다. 슛에 있어서 경지에 오르자 잔기술을 익혔다. 탄탄한 기본기를 토대로 스텝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60m 단거리에서 육상선수 장재근보다 기록이 좋을 정도로 스피드와 순발력이 뛰어나 이충희를 수비하긴 거의 불가능했다. 키가 큰 상대가 수비하자 전매특허인 페이드 어웨이 슛을 개발했다. 이충희가 던진 슛의 포물선은 끝없이 올라가 림도 맞지 않고 그물을 갈랐다. 슛을 던진 뒤에는 항상 넘어져 있을 정도로 몸을 뒤로 눕혔다. 부상 방지를 위한 묘수였다.

    이충희의 득점력은 상상 초월이다. 한국농구에 3점슛이 도입되기 전부터 50점대 득점을 끊임없이 기록했고, 84-85 농구대잔치 결승에서는 처음으로 60점대를 돌파했다. 스스로 기록을 갈아치우며 이충희가 기록한 69점은 농구대잔치 사상 최다득점이었다. 이충희는 100경기를 채우기 전에 이미 3,000득점을 넘어섰다. 평균 30점 이상을 기록해야 가능한 수치다. 득점왕은 항상 이충희의 차지였고, 국내선수 최초로 4,000득점 돌파를 하며 통산 4,412점, 평균 26.7점을 기록했다. 이충희는 1983년 농구대잔치 출범 이후 1992년 은퇴하기까지 9시즌 가운데 5시즌 동안 평균 30점을 넘는 득점력을 과시했다. 이충희는 은퇴 후에도 중국 홍쿠오팀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뛰며 평균 30점 이상을 기록하며 6위에 머물던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 역사적 순간

    허재 src=

    허재에게 가장 역사적인 순간은 1998년 챔피언결정전이다. 1997년 KBL이 출범했을 때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는 강동희, 허재, 김유택을 앞세운 강팀이었고 중앙대를 졸업한 김영만이 가세하면서 철옹성을 구축했다. 하지만 허재는 부상과 김영만에게 밀려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정규리그 MVP와 챔피언결정전 MVP도 후배 강동희에게 내줘야 했다.

    허재가 절치부심했던 1997-1998 시즌에는 지각변동이 있었다. 역대 최고의 외국인선수라 할 만한 조니 맥도웰과 상무에서 제대한 컴퓨터 가드 이상민, 한양대 출신 공수겸장 추승균, 전천후 득점원 조성원이 뭉친 대전 현대 다이냇의 위용을 떨친 것이다. 대전 현대는 31승14패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단연 우승후보 1순위로 꼽혔다. 반면 부산 기아는 26승19패로 3위에 그치고 말았다.

    6강에서 인천 대우 제우스, 4강에서 창원 LG를 모두 3승1패로 제압하며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오른 부산 기아는 예상대로 대전 현대를 만났다. 하지만 부산 기아는 해결사 허재가 오른손 골절상과 발목인대 부상을 입고 있었고 주전센터 저스틴 피닉스도 부상을 당하며 위기에 몰렸다. 그래서일까 챔피언결정전이 시작되기 전 농구팬 열이면 열 모두 대전 현대의 우승을 예상했다.

    하지만 1차전에서 허재는 29득점, 5리바운드, 6어시스트, 5스틸이라는 전방위 활약을 펼치며 적지에서 99-90, 부산 기아의 승리를 견인했다. 2차전에서도 허재는 30득점, 11어시스트, 5스틸을 기록하며 87-78, 부산 기아의 2연승을 주도하며 분위기를 부산 기아 쪽으로 가져왔다. 대전 현대가 3, 4차전을 따내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후 열린 5차전. 허재는 17득점, 8리바운드를 기록, 86-84로 부산 기아의 승리를 이끌며 우승을 눈앞에 뒀다.

    6차전을 다시 대전 현대가 따내며 승부는 최종 7차전으로 넘어갔다. 6강을 거치며 체력이 바닥난 부산 기아는 후반부터 무너지며 결국 101-90으로 패해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해야 했다. 하지만 허재는 챔피언결정전에서 눈두덩이가 찢어지는 부상 속에서도 23득점, 4.3리바운드, 6.4어시스트, 3.6스틸을 기록하며 KBL 역사상 유일하게 준우승팀 소속임에도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했다.

    이충희 src=

    이충희는 고려대와 실업팀 현대의 상징적 농구선수다. 대학시절엔 붉은색으로 농구팬들을 열광시켰고, 실업팀에서는 초록색 물결이 코트를 장악했다. 이충희가 입은 짧은 팬츠에 긴팔 상의 유니폼, 흰색 긴 양말은 농구대잔치 시절을 대변했다. ‘신사’의 이미지에 부합했던 이충희는 여성 팬들의 인기도 한 몸에 받았다. 결국 당대 최고의 탤런트 최란과 결혼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충희는 고려대 시절 농구역사에 남을 49연승 대기록을 세웠다. 중앙대가 최근 52연승으로 고려대의 기록을 넘어섰지만, 실업팀과 함께 경기를 치렀던 고려대의 기록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고려대 49연승 중심에는 이충희가 있었다. 이충희는 임정명, 진효준 등과 함께 고려대를 이끌면서 폭발적인 득점력을 선보였다. 당시 고교 랭킹 1위였던 임정명도 이충희의 그늘에 가릴 정도였다. 현대 입단 후 삼성과 라이벌 구도로 치열한 접전을 펼쳤지만, 이충희가 첫 60득점 기록을 세운 경기는 1985년 1월 2일 농구대잔치 준결승전서 만난 중앙대였다. 당시 중앙대는 허재, 한기범, 김유택이 버티고 있었지만, 이충희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이충희는 국내농구 최다득점 기록을 갈아치우며 114-85, 29점차로 완승을 거둬냈다.

    국제대회에서도 이충희의 활약은 빛났다. 이충희는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만리장성을 무너뜨리고 12년 만에 금메달 획득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이충희가 세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86년 세계선수권대회다. 당시 브라질전서 이충희는 45득점을 기록하며 역대 한 경기 최다득점 공동 6위에 올랐다. 더 경이로운 것은 한국의 전반 득점 기록이 37점이었는데, 이 가운데 이충희의 득점이 36점이었고 나머지 1점은 이문규의 자유투로 만들어졌다. 이충희는 이 대회 이후 NBA 댈러스 매버릭스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인한 병역 특례로 5년간 해외 진출 금지 규정 때문에 한국인 NBA 1호 선수가 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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