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 디즈니에 얽힌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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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디즈니는 1901년 12월 5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아버지 일리아스 디즈니(Elias Disney) 어머니 플로라 콜 디즈니(Flora Call Disney)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기념으로 몇몇 일화를 모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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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디즈니는 애니메이션 세계의 개척자 뿐만 아니라 영화제작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원한 아저씨, 'uncle'로 말이죠.

"It's kind of fun to do the impossible,"
(남들이) 불가능하다는 일을 하는 건 뭔가 재밌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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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Mickey)' 마우스의 원래 이름은 모타이머 마우스(Mortimer Mouse)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릴리안(Lillian)이 더 나은 이름을 제안하죠. '미키'라고 말입니다.


'미키'마우스는 1928년 단편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를 통해 데뷔하죠.
'모타이머'는 나중에 미니(Minnie) 마우스를 두고 미키의 라이벌이 되는 캐릭터의 이름이 됩니다.
미국의 배우 미키 루니(Mickey Rooney)가 나중에 미키란 이름은 자기로부터 가져온 거다라고 주장하지만 근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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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서 1947년까지 20년 동안 월트 디즈니 자신이 미키 마우스의 목소리를 연기했습니다.
하지만 애연가였던 그의 목소리가 미키 마우스를 연기하기에 너무 거칠어질 때 쯤
스코틀랜드 출신 성우 지미 맥도널드( Jimmy MacDonald)가 이어 받죠.
그는 1977년 다른 성우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거의 30년 가까이 미키 마우스를 연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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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애니메이션엔 유난히 핫도그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핫도그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언제 찾을 지 몰라 그의 가정부가 집에 늘 끊이지 않게 보관하고 있다가 주곤 했다더군요.
1929년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카니벌 키드(The Karnival Kid)의 첫 대사가 '핫 도그!' 였습니다.
훗날 디즈니랜드에 휴지통을 어디에 설치할까를 두고 월트 디즈니는 결정을 내립니다.
모든 핫도그 판매상으로부터 25걸음 안 쪽으로~
이건 자기 스스로 핫도그를 보다 편하게 먹기위한 방법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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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에 걸친 제작기간, 150만불(예정됐던 비용의 3배의 제작비)을 쏟아 부은 뒤에야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완성됩니다.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퀄리티를 지닌, 음성에 컬러까지 입혀진 애니메이션이였습니다.
헐리우드 인사이더를 포함한 대부분의 매체에선 이를 두고 '디즈니의 어리석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월트는 이를 무시했죠.
결국 1937년 대박을 터뜨린 영화로 기록됩니다.
이후로도 손꼽히는 유성영화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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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대박을 터뜨린 후,  1938년 월트는 부모님께 저택을 사드립니다.
불과 몇 주 뒤, 그 집 벽난로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죠.
월트는 수리하라는 지시를 내리지만 문제는 고쳐지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그만 사망하고 맙니다. 아버지는 간신히 목숨은 건졌습니다.
이 일은 끝내 트라우마로 남아 월트를 괴롭힙니다. 월트 자신도 그 일을 입 밖에 내는 걸 극도로 꺼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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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디즈니의 캐릭터엔 어머니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백설공주, 피노키오, 신데렐라, 피터팬 등이 그러합니다. 있어도 계모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밤비도 그러하고요.


훗날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그의 어머니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서 그런 것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중 일부 캐릭터들이 만들어질 때 그의 어머니는 생존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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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 동안 월트는 무려 23번 오스카 상을 거머쥐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59번이나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고요.)


1939년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로 오스카 상을 수상할 때 
부상으로 당시 10살이였던 셜리 템플(Shirley Temple)로 부터 7개의 '미니어처'도 함께 받게 되는 영예를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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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기여한 바도 큽니다.
2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엔 이런 선전 영화도 만들곤 했죠.
도날드 덕이 히틀러를 비웃는 내용의 1943년도 영화, '총통의 얼굴'(Der Fuerher's Face) 같은 작품 말입니다.


1942년에 도날드 덕은 '새로운 미국 정신'(The New Spirit)이란 영화에도 등장해 
전쟁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국민이 세금을 잘 내게끔 독려하는 작품에도 등장했습니다.
미국 재무부의 의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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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 대전 이후엔 그 또한 '레드' 공포를 겪던  또 다른 국민 중 하나였습니다.
(미국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반공을 우선시하는 영화제작자 연합' 이런 단체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메커시즘으로 대변되던 반공주의가 휩쓸던 시기였죠.


미 의회 앞에서 시위를 하던 노동자 단체와 당시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배우들과 대척점에 놓이게 돼, 기소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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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디즈니와 그의 형, 그리고 사업 파트너 로이가 미국 각 지상파 방송사에게 '디즈니 앤솔로지' TV 시리즈를 제안했을 때 
CBS와 NBC는 거절합니다만, ABC는 받아들였죠.
첫 TV 시리즈가 1954년 10월 수요일 밤 전파를 타고
이후 일요일 프라임 타임으로 자리를 옮겨
"Walt Disney Presents" 혹은 "Walt Disney's Wonderful World of Color"란 이름으로 수십년 간 방송됩니다.
첫 해 벌어들인 수익으로만 월트는 1955년 디즈니랜드를 개장할 자금을 벌어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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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랜드의 직원들은 모두 성을 제외한 이름으로만 불렸습니다.
월트 디즈니도 예외는 아니였고요. "미스터 디즈니"라고 불리우는 걸 무척 싫어했습니다.
평소 그는 그의 직원들에게 반드시 '미스터'라고 불러야 할 사람은 그의 회사 법률팀 변호사 뿐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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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랜드가 개장했을 때 월트는 그 안에 비밀스러운 아파트를 짓고 정문을 통해 출입하는 거대한 인파들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이를 즐기곤 했는데 다른 이를 그곳에 초대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그곳엔 월트를 기려 창가에 전등을 켜놓았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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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와 레이 크록(Ray Kroc) 둘 다 세계 제1차세계 대전에 참전해 적십자에서 같이 복무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10대의 어린 나이였던 그들은 징집될 때 물론 나이를 속였죠.)
수십년 후, 크록이 맥도널드를 주무르는 자리에 오르자 월트에게 편지를 씁니다.
디즈니랜드에 맥도널드를 오픈할 수 있게 말이죠.
월트는 단호하게 '노'라고 말합니다.
나중엔 결국 디즈니랜드 테마파크 안에 맥도널드가 들어서게 됩니다만,
한참 뒤의 일이죠. 

맥도널드 관계자들은 이 당시 월트가 맥도널드 프렌치프라이 값을 50센트 올리자는 거래조건을 크록이 거부해 파토를 냈다고 하는데.. 
물론 증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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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는 25살 이후로 콧수염을 길러왔는데 디즈니랜트 테마파크에서 일하던 직원들 어느 누구도 수염을 기르지 못했습니다.
월트는 디즈니 직원들에게 무조건 깨끗한 이미지가 최선이다라고 하면서 아예 '금지'시켰는데요.
심지어 디즈니랜드의 게스트도 예외는 아니였습니다.
1964년엔 가수 로저 맥귄( Roger McGuinn )의 헤어스타일을 문제 삼아 너무 길고 너저분하다고 입장이 거부되기도 했습니다.
월트의 사후 한참 뒤, 디즈니랜드 직원들은 2000년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콧수염을 기를 수 있게 됩니다.
2012년이 되어서야 염소수염, 구렛나루 같은게 허용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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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세계 디즈니 리조트 중 한 곳의 모습입니다. 2016년에 개장했죠.
월트는 기차덕후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사무실에 모형을 가져다 놓았을 뿐만 아니라
1948년엔 디즈니 스튜디오에 아예 엔지니어까지 고용해 월트의 아내 릴리안의 이름을 딴 'Lilly Belle' 이란 증기기관차를 만들게 합니다.
실제 움직이는 기차 미니어처를 뒷뜰에다가 마련해놓고 시운전을 하게 만들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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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에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그의 새 작품 '블라인드 맨'(The Blind Man)을 촬영할 로케이션으로 디즈니랜드를 점찍고 월트에게 요청합니다. 
영화 제작을 하는데 자문을 구하고 싶기도 했을 겁니다.
이 당시 그의 첫 작품 싸이코로 명성을 얻은 직후였죠. 
월트는 거절합니다.
싸이코 같은 구역질 나는 영화는 디즈니랜드 테마파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꼰대 기질도 있었던 듯)
제임스 스튜어트는 블라인드 맨 프로젝트를 엎습니다. 결국 만들어지지 못했죠.

재밌는 사실 하나: 히치콕 감독은 나중에 월트의 친구이기도 하면서 미키 마우스의 크리에이터이기도 했던 사람(ub iwerks)을 고용합니다.
영화 '새'(The Birds)의 특수효과를 맡기기 위해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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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월트 가족의 가정부로 일하면서 요리까지 책임졌던 셀마 하워드(Thelma Howard)는 매번 크리스마스 마다 월트로 부터 선물로 주식을 받습니다. (일종의 스톡옵션이라고 할까요. 스톡옵션은 돈 주고 사야하지만 이건 그냥 증여)
이게 불어나서 셀마가 1994년 사망할 때엔 그녀가 보유한 주식의 가치가 당시 9백만불을 훌쩍 넘기게 됩니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그녀 재산의 절반은 그녀의 아들에게 물려지고 나머지는 자선단체에 기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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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는 그가 숨지기 직전에 '커트 러셀'이라고 휘갈겨 쓴 한 장의 메모를 남깁니다 .
그 당시 커트 러셀은 월트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잘 알려지지 않은 아역 배우였습니다.
모두 이유를 몰랐고 이는 커트 러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월트 디즈니 사후 몇 년 뒤, 커트 러셀은 디즈니 직원으로 부터 이 메모를 넘겨 받습니다.
월트가 숨지기 직전 남긴 마지막 메모라고 하면서 말이죠. (무슨 이유였을지 궁금합니다. 스타가 될 테니 열심히 하란 의미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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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그의 65세 생일 불과 열흘 뒤 월트는 사망합니다.
당시도 그랬고 지금도 월트 디즈니 시신이 냉동되어 보관중이다란 루머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냉동인간이 되었다는 소문이죠.)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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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미키 마우스가 태어난 생일(50회)에 맞춰 헐리우드 워크 오브 페임에 '미키 마우스'란 스타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사람이 아닌 카툰 캐릭터로선 최초였죠. 
그로 부터 다시 40년이 흐른 뒤 미니 마우스도 그녀만의 이름을 새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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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디즈니의 철학
"If you can dream it, you can d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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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유북지기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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