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타 죽는 순간에도 초연





베트남 틱광둑(釋廣德) 스님의 소신공양


1963년 베트남의 대로에서 딘디엠정권의 불교탄압과 미국의 공격에 대해 소신공양을 감행해 거센 화염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가부좌자세를 유지했던 그의 모습은 물질문명과 현대무기로 얼마든지 힘없는 동양을 농단할 수 있다고 여겼던 서양 세계를 전율케 했다. 혹자들은 힘의 논리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미국 대 베트남’의 전쟁에서 미국의 패배는 이미 이 순간 결정되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최근 틱광득 스님의 삶을 추적해 우리나라에서 출간한 일본인 미야유치 가쓰스케씨가 쓴 <분신>(토향 펴냄)에서 조명된 틱광둑 스님은 베트남을 유린한 프랑스와 미국 등 서양제국과 불교를 탄압한 부패한 독재 디엠정권에 항거하며 65살에 소신공양을 단행했다. 3년간 무문관에서 처절히 정진하기도 한 고승인 틱광둑 스님은 베트남 불교를 위해 언제든 소신공양을 하겠다고 베트남불교본부에 청원을 한 상태였다. 



서양세계에 아시의 정신을 보여주자는 계획하에 연출됐던 그의 소신공양은 군과 경찰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 승려들이 틱광둑 스님을 둘러싸고 십자대로에서 누워있고, 서양의 특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행됐다. 당시 독신이던 응오 딘 디엠 대통령의 배후에서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동생 응오 딘 뉴의 처로 ‘베트남의 여왕’으로 불렸던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 마담 뉴는 틱광둑 스님이 소신공양하자 “중의 바비큐라니 재미있네”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미국의 포기로 디엠정권이 붕괴돼 독재자의 일족들이 오히려 세기의 비웃음 거리가 되고 말았다.



온몸 불타도 가부좌 풀지 않고 끝내 뒤로 넘어져

소신공양을 단행하는 순간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아 주위 사람들조차 놀라게 했던 광득 스님이 십자로에 연화좌 자세로 앉자 그의 제자인 창구 스님이 틱광둑 스님의 주위를 돌며 미리 준비한 가솔린을 흠뻑 뿌렸다. 그러자 틱광둑 스님이 미리 준비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지만 가솔린에 젖은 가사에 불이 붙지 않았다. 그러자 주위에서 건네준 성냥갑을 받아든 틱광둑 스님이 성냥을 그어 스스로 불을 질렀다. 틱광둑 스님의 몸이 불길이 휩싸이자 누워 있던 비구 스님들은 일어나 틱광둑 스님을 향해 절을 올렸고, 곁에 있던 비구니 스님들은 울부짖었다. 데모 대열을 막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섰던 병사들도 ‘받들어 총’ 자세를 취했다. 

불길이 거세지자 틱광둑스님의 상반신이 앞으로 쓰러질 듯이 기우뚱했다. 틱광둑 스님은 소신공양 전 제자들에게 예언했다고 한다. 만약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다. 그때는 해외로 망명하라고 했다. 하지만 뒤로 쓰러진다면 우리들의 투쟁은 승리하고 결국 평화를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온몸이 훨훨 불타고 있던 광득 스님은 마지막 혼신을 다한 듯 다시 허리를 곧추세워 가부좌를 했고, 마지막엔 뒤로 넘어졌다. 어떤 화마도 평화에 대한 그의 의지를 꺾지 못한 것이다.

불에도 타지 않고 황산에도 녹지 않은 심장

그의 장례행렬엔 무려 10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의 관에 다이너마이트가 설치돼 있다는 독재정권의 유언비어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을 따르는 사람들도 7킬로미터가 이어졌다. 소신공양 후 남은 그의 법체는 소각로에 옮겨져 디젤 연료를 사용한 4천도의 불로 6시간 동안 태워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심장은 타지 않고 남았다. 다시 연료를 보충해 두 시간을 더 태워도 심장은 타지 않았다. 그러자 등 서구 언론은 이를 ‘영원의 심장’이라고 불렀다.



 응오 딘 디엠 정권은 틱광둑 스님의 심장이 더욱 거센 활화산이 될 것을 염려해 비밀경찰청장인 쩐낌 때웬을 파견해 틱광둑 스님의 심장에 황산을 뿌렸다. 그런데도 심장은 녹지 않았다. 비밀경찰들이 그 심장을 강제로 가져가려고 하자 스님들은 금속 용기에 담아 구리줄로 봉인하고 사이공 시내의 스웨덴 은행에 맡겼다. 전후 틱광둑 스님의 심장은 하노이국립은행으로 옮겨져 보관돼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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