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대나무숲 [무신경]

무신경.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개 나왔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남자는 커피가 올라간 쟁반을 받아 구석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 앞에 가 앉았다. 여자는 핸드폰에 집중해 있었다. 남자가 자리에 앉자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잠깐 쳐다본 후에 얼음이 떠있는 커피, 다시 핸드폰으로 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뭐, 재밌는 거 있어?” 남자가 핸드폰을 바라보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그냥.” 여자는 무신경 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다. 2주 만인가? 지난번에 너네 집앞에서 잠깐 본 뒤로.“ “그러네. 오랜만이네.” 남자는 여자의 싱거운 반응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빨대의 포장지를 뜯었다. 빨대를 커피에 꽂아 여자 앞에 놓았다. “자, 여기 빨리 마셔.” “응, 알았어.” 여자는 대답은 했지만 여전히 손바닥 위의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모습을 보고 있기만 하였다.

 

여자는 기다리는 남자의 시선을 의식했는 지 한마디 했다. ”나 이것 답장만 좀 하고. 너 먼저 마셔.” 

“아냐, 너랑 같이 마시기 시작해야 속도가 맞지. 난 금방 다 마셔버리잖아.”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참 별나다. 너도.” 여자는 남자의 기다림이 조금은 미안했는 지 재빠르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자, 이제 됐지?” 남자는 그리고 나서야 자신의 커피에 입을 댄다. “아.” 남자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왜? 맛이 이상해?” 여자가 물었다. “이빨이 아프네. 평소에는 괜찮은데 차가운 것 먹을 때만 이가 시린다. 왜 그러지.” 남자의 표정에는 고통이 남아있었다. “충치 생긴 거 아니야? 치과 가봐 이상한 사람아.” 남자는 피식 웃었다. “으… 이상한 사람이래. 아재 개그. 귀여워.” “아 근데 치과 가기 너무 무서워” 남자는 치과 생각만해도 치가 떨리는 듯 몸서리 치면서 말했다.

 

“애도 아니고. 너는 그 나이 먹고 아직 치과도 무서워 하냐. ” 여자는 짐짓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왜… 무서울 수도 있지. 나는 그 묘한 치과 냄새도 무섭고, 그 치과의자도 너무 무섭게 생겼어. 고문 의자 같아. 그리고 드릴 소리랑 충치 치료할 때, 이빨이 갈아지는 느낌이 너무 싫어.“ “그럼 계속 그렇게 아프던가.” “아 그건 또 싫은데.” “병원을 가 그러면.” “갔는데 막 이빨 너무 많이 썩어서 뽑아야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뽑아야지.” “너무 쉽게 말하는 것 아니냐?” “그럼 어떻게 해 의사가 뽑자면 뽑아야지.”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아 걱정되고 무섭다. 나 치과 같이 가주면 안돼?” “나 요즘 바쁜 것 알잖아.” “알았어. 그럼 용기를 내서 혼자 가보도록 할께.” 남자의 요청은 손쉽게 거절되었다. 

남자는 그날 저녁 내내 이빨의 통증과 치과의 공포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다음날이 되서야 치과에 전화를 해 예약을 잡았다. “이번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예약 가능 한가요?” “네. 이번주 토요일에 예약해 드릴께요. 혹시 변경 사항 있으시면 미리 연락 주셔요.” “네. 감사합니다.” 

 

 토요일 오전 9시. 치과로 향하는 남자의 심장은 그녀와의 첫 데이트처럼 쿵쾅거렸다. 아 물론 기분 좋은 쿵쾅은 아니었다. 치과를 매우 무서워했던 남자는 거의 2년만에 치과를 방문하는 것이다. 걱정이 되었다. 충치가 많으면 어떻게 하지. 치과 치료받기 정말 싫은데.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보니 치과 문앞에 도착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늘 7시 예약했던 사람입니다.” “아 무었 때문에 오셨어요?” “왼쪽 어금니가 아파서요.” “예진표 작성하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남자는 자신의 증상을 예진표에 적었다. 평소에는 괜찮은데, 차가운 것 먹을떄 만 이가 시립니다. 그리고 잠시 파노라마 엑스레이를 몇 장 찍은 뒤 마음을 졸이며 치과의자에 앉아 의사를 기다렸다. 의사가 왔다. 엑스레이 사진에 있는 남자의 어금니를 가리키며 의사가 말했다. “여기 왼쪽 어금니에 충치가 상당히 깊이까지 있어요. 여기 사진에 보시면 어금니 신경까지 충치가 있습니다. 신경치료를 해야겠어요.” 남자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 다른 방법은 없나요? 치료받기 무서운데.” 남자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혹시나 고통스런 치료를 피해갈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네, 이정도로 충치가 깊을 때는 신경치료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조금 더 일찍 오셨으면 단순한 충치 치료로도 가능했을 텐데, 이미 충치가 너무 깊내요.” “알겠습니다. 그럼 신경치료 할께요.” 남자는 의사의 말에 더 이상 묻지 않고 치료를 받기로 했다. 방법이 없다는데 어쩌겠는 가. “오늘 당장은 뒤에 예약한 환자분이 게셔서 힘들고요. 다음주 중으로 다시 예약 잡아 주세요.” “아, 그리고 신경 치료 하시면 음식 먹기가 얼마동안 불편할 수 있습니다. 신경치료 하기전에 맛있는 것 좀 많이 드시고 오세요.” 

 

남자는 진료가 끝난 후 다음주의 같은 시간에 예약을 잡고 병원을 나왔다. 병원에서 나오자 괜히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곧 치과용 드릴의 위잉 소리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신경 좀 쓸 걸. 치과도 자주가고, 이빨도 잘 닦았어야 했는데. 남자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신경 치료 받는 동안은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남자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 신호음만 한참이 반복됐다. “고객님이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남자는 전화기를 끄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한 후에 두시간을 침대에서 앓는 소리를 내면서 있었다. “신경치료라니 너무싫다…으아아아아.” “우웅..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남자는 재빨리 받았다. “왜 전화했어?” 여자가 물었다. “응, 자기야. 나 방금 치과 갔다 왔어.” “치과에서 뭐래?” “충치가 너무 깊어서 신경치료 받아야 된다고 그랬어. 으아 너무 무섭다. 그런데 신경치료 받는 동안은 맛있는 거 많이 못먹을 거라고, 의사선생님이 그 전에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오라고 그랬다.” “알았어. 맛있는거 많이 먹어.” “아아… 자기야. 우리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다음주 금요일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전에 워커힐에서 딸기 뷔페 먹고 싶다고 했잖아. 거기 가자 거기.” 여자가 잠시 말이 없었다. “나 요즘 바쁜데.” “우리 제대로 데이트 한지 한참 됐잖아. 오랜만에 제대로 근사한 것도 먹고 좀 하자. 안될까?” “금요일 몇 시?” “전에 알아봤는데 저녁 8~10시 예약할 수 있다고 그랬어.” 여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러자 그럼.”

 

여자와 통화를 마치자 마자 남자는 호텔에 전화를 걸었다. “다음주 금요일 8시에서~10시 예약 가능한가요?” “네, 가능합니다.” “그럼 두명 예약 부탁드려요.” 얼마만의 데이트인가. 남자는 금요일에 여자를 볼 생각에 토요일에 있을 신경치료도 까맣게 있은 듯 했다. 

 

금요일 저녁 5시. 남자는 여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이따 7시쯤에 데리러 갈까?’ ‘아니, 나 일할 것이 좀 남아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 집중해서 빨리 일 끝내구 와. 이따봐~’ 남자는 설래는 마음으로 딸기뷔페가 있는 호텔로 향했다. 7시 30분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뚜” 연결음 만이 있었다. 전화를 끊고 기다렸다. 8시가 되었다. 슬슬 줄을 서있던 사람들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 일단 들어가기로 한다. 8시 15분. 여자에게 문자가 왔다. ‘진짜 미안해. 오늘 못 갈 것 같아. 일이 꼬여서. 이따 이야기 해.’ 남자는 문자를 세번 읽었다.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지만 다시 한번 읽었다. ‘그래 알았어.’ 남자는 짧지 않았던 연애 기간을 통틀어서 가장 짧은 문자를 보냈다. 

 

이제 화가 나지는 않았다. 진짜 알겠다는 의미의 ‘알았어.’ 였다. 여자가 조금씩 뜸해졌을 때, 처음에는 그게 그렇게 서운하고도 아팠다. 연락을 해도 잘 받지 않고. 만나도 금방 헤어지고. 같이 있을 때도 비어 있다는 느낌이 처음 들었을 때. 너무나도 아팠다. 그래서 다시 돌려보려고 꽤나 많은 노력을 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 아마 다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제는 알았다. 그녀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 불현듯 이 사실, 그녀가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직시하게 되자, 신기하게도 아프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오랜 아픔 끝에 드디어 무신경 해진 것이다.  남자는 한참을 혼자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내, 먹음직스러운 딸기를 접시에 담아 왔다. 붉은 딸기와 흰색 생크림 갖가지 디저트들. 남자는 혼자 묵묵히 음식을 먹는 데에 집중했다. 맛있었다. 오랜만의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마지막에 딸기 아이스 크림을 먹을 때, 이빨이 잠시 시리긴 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일 신경 치료를 받고 나면 이 고통도 없을 거니까.

 

토요일 오전 10시. 남자는 치과에 갔다. 오늘은 왠지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치위생사의 안내를 받아 치과 의자에 앉았다. 의사가 치료 과정을 설명했다. “일단 오늘 치아의 충치를 제거하고 신경관 까지 뚫고 들어갈 거에요. 그리고 신경을 제거할 겁니다. 어금니 같은 경우에는 한번에 다 제거하기는 힘들고 1주일 간격으로 2~3회정도 내원이 더 필요합니다. 신경이 제거되지 않는 동안 에는 통증이 좀 있을 수 있습니다.” 남자는 물었다. “이거 다 마치고 나면 안 아프게 다 치료되는 것 맞죠?” “더 이상 치아에 통증은 없을 것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게 치료됐다는 표현은 사용하기가 좀 그래요. 신경치료는 말만 들으면 아픈 신경을 치료해서 안아프게 하는 것 처럼 들리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한번 염증이 생긴 신경은 현재 의술로는 다시 건강한 상태로 되돌릴 수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이것을 치료 하느냐? 간단합니다. 그냥 신경을 제거해 버리는 거에요. 그럼 통증도 없어지고 환자 입장에서는 치료되었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신경이라는 것은 단순히 아픔을 느끼게 하기 위해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치아는 이 신경을 통해서 영양분을 공급받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경을 제거해 버리면 치아에 양분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쉽게 말해서 죽은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신경치료는 항상 마지막 단계에 하는 거에요. 한번 신경을 제거하고 나면 통증은 사라지지만 치아를 예전 상태로 되돌릴 수도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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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징징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