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문화재

-북한의 문화재-
평양성 - 평양시 중구역 , 평천구역
고구려는 427년 보다 조건이 유리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수도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고구려는 지난 시기 수도방위의 교훈과 강력하여진 국력에 기초하여도시 전부를 성벽으로 둘러막은 새 수도용 평양성을 건설하게 되었다.평양성은 북쪽에 금수산이 솟고, 동, 서, 남 세면에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막아 해자를 이룬 유리한 지대에 자리잡았다. 그 둘레는 약 16km이다.평양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잇점을 종합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창안해 낸 평산성형식의 새로운 수도성이었다.
정릉사 -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정릉사는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하며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위하여왕릉을 옮겨올 때에 그 앞에 지은 절이다.오래 전에 허물어져 모습을 감추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하여 찾아냈으며, 그에 기초하여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발굴할 때 여기에서는 18채의 건물터와 10개의 회랑터, 1 개의 탑터, 그리고 물도랑이 드러났다.
정릉사 8각9층탑
보광전
東明王陵 -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제당(전실 높이 10m,제실높이 13m)이 능은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 무덤을 5세기에 재축조된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1993년에 대대적으로 개건되었다. 부여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동명왕(고주몽,혹은 추모)은 어린 시절부터 무술에 능하고 지략이 출중하였는데, 뜻을 같이 했던 오이, 마리, 협부 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동명왕은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고 외적들을 물리치면서 19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하고 있다.
무관상 : 부분노, 부위염, 무골, 묵거
문관상 : 오이, 재사, 송양왕
을밀대 -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처음 세워진 누정이다.
울밀대란 '윗미르터(윗밀이언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여기에 '을밀선인'이 자주 하늘에서 내려와 논데서 ,또는 '을밀장군(을지
문덕 장군의 아들)'이 이곳을 지켜 싸운데서 온 이름이라는 전설도 있다.지금의 누정은 1714년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 지은
것이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을밀상춘(을밀대의 봄맞이)'으로 일찍부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평양8경의 하나로 일러왔다.
현무문 -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현무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북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모란봉(최승대가 있는 봉우리)과 을밀봉 사이에 있어 평양성 북방 방위의 요충이었다.
대동문 -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947년 중건하였다가 1011년 화재로 파괴된 것을 그후 다시 세웠다가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지금의 문루는 1635년 재건하고 1852년과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완성한 것이다.

開城市 왕건왕릉 - 개성시 해선리
고려 태조 왕건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하는 송악산의 줄기가 뻗어내려 온 만수산의 나지막한 등성이 위에 자리잡고 있다. 943년에 창건된 것을 1994년에 개건하였다.
선죽교 - 개성시 선죽동
선죽교는 고려시대 후기의, 길이 8.35m, 너비 3.36m인 석조 다리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 다리는 1216년 이전에 건설되었고 건설 당시의 이름은 선지교였다. 그후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 다리에서 피살된 때부터 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현재 이곳에는 난간이 있는 다리와 없는 다리가 있는데 난간이 있는 다리가 선죽교이다. 이 난간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들이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설치한 것이고 난간이 없는 다리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그 곁에 새로 놓은 것이다. 선죽교 옆에는 선죽교라고 쓴 비석이 있다. 비문은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로 전한다.
숭양서원 - 개성시 선죽동 
숭양서원은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1573년의 조선시대 건물이다. 고려의 유학자였던 포은 정몽주가 살던 집자리에 고려시대 말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 1573년에 고쳐지어 문충당이라 부르다가 1575년에 사액을 받아 숭양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숭양서원에서는 정몽주 외 16세기의 철학가인 화담 서경덕과 7세기의 학자이자 문학가인 잠곡 김육을 비롯한 유학자들을 추모하여 제사하였다.
범사정 - 개성시 박연리 
범사정은 개성시 박연리에 있는 1700년에 세운 조선시기 건물로 우리나라 3대 명폭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옆에 끼고 대흥산성 북문으로 오르는 언덕길 중턱에 있는 정자이다.중경지'에는 1700년에 이 건물을 세우고 옛 이름대로 현판을 달았다고 쓰여있다.
박연폭포 - 개성시 박연리
개성시 중심으로부터 26km 산성리의 천마산과 성거산에 끼어 계곡에 있고 높이는 35m이다. 폭포 위에 박연이라고 불리는 직경 8m의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고모담이라 불리우는 직경 40m의 용추의 물가에, 큰 '용암'이 수상에 머리를 내밀고 있다. 용추의 동쪽언덕에 범사정 이라는 절이 있다. 옛날 어느 만월 밤 박진사라는 청년이 불고 있는 피리 소리에 홀려서, 이 호수의 용녀가 그에게 반해 호수 속으로 유인해 가 버렸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슬픈나머지 폭포 밑에 몸을 던졌다. 그 이후에 호수를 박연이라하고, 폭포밑 담을 고모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옛날부터 조선 3대폭포 중 하나이다. 폭포는 명유 서경덕(徐敬德)과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이른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알려져 왔다.
공민왕릉 - 개성시 해선리
공민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 1365년~1374년에 해당하는 고려시대 왕릉이다. 2기의 무덤을 동서로 나란히 세운 쌍릉형식으로,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서쪽)과 왕비(노국 공주)의 무덤 정릉(동쪽)으로 이루어졌다. 공민왕은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방대한 무덤공사를 직접 지휘하였다
고려성균관 - 개성시 방직동
려성균관은 개성시 방직동에 위치한 고려시대(992년)에 세운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1602~1610년)에 재건한 건물이다. 고려는 건국 초기 개경(오늘의 개성)에 국가가 운영하는 학교를 세웠고, 992년에는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을 설립하고 여기에 국자학, 대학, 4문학과 율학, 서학, 산학 등 6개 학과를 두고 국가 관리 양성 및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 국자감은 1298년에 성균감으로, 1308년에 성균관으로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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