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을 아시나요?


고려인을 아시나요?

 

 

중앙아시아 고려인

극동 변동(원동) 지역에 살던 한인들이 일본의 스파이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예방조처로 소련 스탈린의 한인민족 강제이주정책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연해주 극동 변동(원동)에 살고 있던 한인 약 20만 명이 모두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우즈베크 등지로 이주되어 소련시민으로 동화되었고 이들을 고려인이라 부른다.

 

 

영문도 모르고 척박한 땅으로 버려져 살아야했던 우리의 민족 ‘고려인’

그 고단한 75세월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고려인 1세대와 그 후손의 이야기

 

 고려인 1세대 박 류바 할머니 인터뷰

 

 

 박 류바 할머니(84세)는

1937년 9살의 어린나이에 중앙아시아 척박한 땅에 버려져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다.

할머니에게 강제이주 당시 이야기를 들었다.

 

땅굴을 파고 풀을 뜯어 먹던 시절

“내 여기와 고생 모질게 했소. 추운 겨울에 어딘지 모를 땅에 버려졌단 말이오. 잠잘 곳이 없어 살기위해 땅에 굴을 파고 먹을 것이 없어 풀을 끓여 먹었소. 기차를 탈 때(강제이주 기차) 아무 것도 챙기지 못 했지. 신발 한짝이 없어 헝겊으로 신발을 해서 땅에다 받쳐야 되지... 추운 겨울 동상 걸려 죽은 사람도 많소. 그때 고생한거 생각하면 눈물이나오.”

 

박 류바 할머니는 강제이주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9살 어린나이.. 감당 할 수 없던 고통을 이겨낸 산 증인이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당시 고려인의 강한 정신력으로 척박한 땅을 사람이 사는 마을로 일궈냈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곧 바로 가족의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녔다.

자식들을 키우느라 젊은 시절 그 넓은 목화밭을 밤낮으로 뛰어다니면서 일을 하였소, 젊은 시절 내 자식들 나처럼 고생 아니하라고 죽도록 일하였단 말이오 그렇게 고생하여 지금은 다리가 성치 못해 걷지를 못한단 말이오. 그렇게 귀하게 키운 자식들이 나보다 먼저 죽었지, 아들 며느리들이 나보다 먼저 죽었지, 내가 네명을 땅에 파묻었소....내 가슴이,,,,,너무 아픈단 말이오... 한국이 고려사람이 사는 나라 아니오? 고려사람이 사는 나라. 우리도 고려사람이니까, 우즈베키스탄에 살다가 고려 사람이 사는데 가보면 마음이 활짝 펴지고, 어떻게 사는가도 보고, 그러면 죽어도 원이 없단 말이야."

 

박 류바 할머니께서는 고단했던 세월을 생각하시며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언젠가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척박한 땅에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타국에서 가족을 먼저 떠나 보냈야했다.

 

 고려인 3세 박 율라 인터뷰

 

박 율라(17세)는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 3세이다.

 

나는 누구인가?

'할머니와 부모님은 한국어를 배워야한다고 했다. 나는 한국어보다 러시아를 먼저 배웠고,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에 배울 필요를 못 느꼈다. 할머니는 강제이주 당시에 대해서와 모국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할머니는 늘 모국을 방문하길 원하셨지만 나는 모국이라는 한국이 멀게만 느껴졌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소수민족의 하나인 고려인으로 살고 있지만 모국인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

   

중앙아시아에 퍼진 한류문화

'우즈베키스탄은 한류문화 바람이 불었다. 우즈베키스탄에도 한국에 대해서 알려지면서 고려인들의 대한 인식도 자연스럽게 좋아졌다. 나도 한국의 드라마, K-POP등 한국문화를 접하기 시작하였다. 전파를 통해 자연스럽게 모국의 모습을 알게 되었고, 더 알고 싶어져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한글을 배우니 자연스럽게 전통문화를 알게 되었고, 뭔가 흐릿하게만 느껴졌던 모국이 가깝게 느껴졌다. 더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해서 꼭 한번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

 

박 율라는 정체성 혼란의 시기를 겪었지만 현재는 한민족으로써의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한국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한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는 박 율라는 이야기로만 듣던 한국을 경험하고 싶다고 전했다.

  

 중앙아시아 살고 있는 고려인 후손들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난 고려인 후손들> 

 

소련체제 당시 소수민의 언어사용을 금지하여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머나먼 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국어 점차 잊게 되었다. 소련 붕괴이후 자유롭게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고려인 1세들을 생계를 위하여 온종일 일을 해야만 했다.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모국어를 접하지 못 하면서 러시아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 시장에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고려인 모습>

 

고려인 후손들은

오랜 세월 사용하지 못한 모국어인 한글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이제 한글을 배우고 싶어도 한글을 사용하는 고려인도, 교재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에 고려인 후손들은 모국어를 배우는 것이 점점 힘들져 간다.

 

중앙아시아의 40만명의 고려인 1세대와 후손들이 살고 있다. 강제이주 75년이 지난 지금도 모국의 전통문화와 언어를 잊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사실상 고려인 1세들과 2세들만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살아계신 고려인 1세들과 1.5세들은 후손들이 모국의 언어와 문화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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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 1세들이 힘겹게 지켜온 ‘민족의 뿌리’를 잃어버리는

또 한 번의 아픔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강제이주에서 중앙아시아에 정착하기

 

변동 지역에 한인

변동 지역에 한인들이 모여살기 시작한 이유는 1860년대에 한국의 정치 불안과 빈곤으로 인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최초 20가구 약 60명의 한인이 최초로 이주하였지만 나라가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많은 한인들이 계속 이주하여 살았다.

 

 

 

 

강제이주의 이유

1937년 9월 소련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이 시작되었다. 약 2만 명의 변동지역에 살고 있던 한인들을 일본의 스파이가 될 수 있다는 오명으로 강제이주 되었던 것이다.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 문서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인민위원회 및 중앙위원회는 아래와 같이 명한다.

일본의 간첩행위가 극동지방에 침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한다.

 

-연해주 극동국경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한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아랄해, 발하쉬 호수 및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으로 이주 시킨다.

-지체 없이 추방을 시작하여 1938년 1월1일까지 추방작업을 종결한다.

-한인들이 재산, 농기구 및 가축을 갖고 이주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주자들이 남기고 가는 부동산 및 파종된 종자에 대해서 보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추방시 발생하는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치를 취해야 한다.

-카자흐스탄 공화국,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인민위원회는 한인들의 거주 지역과 주거지를 결정하고 이주자들이 경제적 적응을 할 수 있도록

 협조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한다.

-국가철도는 한인들을 극동지역에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기는데 있어 적시에 기차 편을 제공한다.

-이주경로, 출발하는 이주자 수, 도착하는 이주자 수, 그리고 해외로 이주하는 이주자 수를 10일마다 전보로 보고해야 한다.

-한인들이 이주해가는 지역 경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국경수비대를 3000명으로 증원한다.

-인민위원회는 한인들이 비운 곳에 국경 수비대가 주둔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이 문서의 내용과 같이 연해주의 살고 있던 모든 한인은 강제이주 되었다. 문서의 내용중 ‘이주자들이 남기고 가는 부동산 및 파종된 종자에 대해서 보상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지만 강제이주 되었던 한인들은 사실상 보상이 거의 없었으며,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았다고 증언하였다.

 

이주열차생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에 한 달 동안 기차에서 생활했다. 갑작스러운 강제이주 통보로 한인들은 집에 있던 먹을거리만 다소 챙겨 기차에 실렸다. 그야말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지니고 열차에 오름 셈이다. 기차는 사람을 싣는 기차가 아닌 짐을 싣는 화물열차였다. 열차 안은 허리도 마음대로 펼 수 없을 만큼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화장실도 없어 열차가 정거장에 잠깐 멈추면 그때 해결해야하는 아주 열악한 시설에 생활하였다.

 

                      

 

한 달간의 기차생활에서 물과 음식은 제공되지 않았다. 집에서 급하게 챙겨온 음식물을 먹거나 정거장에 기차가 서면 먹을 것을 사 먹기도 하였지만 돈이 있는 사람만이 사 먹을 수 있었을 뿐 이다. 일주일에 한두 곳에 정거하다보니 정차기만하면 물 찾는 사람들과 대소변을 보기위한 사람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부족한 음식과 물로 아무것 없어 닥치는 대로 먹으며 지냈다. 물을 끊이거나 조리할 수 없어 마른음식을 먹다보니 노인들과 아이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매번 정거하는 역에서만 물을 구할 수 있어 물이 자주 바뀌다보니 배앓이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많은 이들은 기차생활에서 목숨을 잃었다.

 

강제 이주된 척박한 땅에서의 생활

1937년 9월에 시작하여 그 해 12월 강제이주가 완료되었다. 한 달 정도 기차를 타고 마침내 도착한 중앙아시아 중 어떤 이들은 카자흐스탄에, 어떤 이들은 우즈베키스탄에 내려졌다. 추운겨울 방한 준비도 없이 허허벌판에 떨어진 한인들은 거처할 데가 없어 서로 껴안은 채 공포의 시간을 보냈다. 추위를 피해 거처할 곳을 찾아 버려진 빈집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부터 땅굴집을 짓고 사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그렇게 한인들은 척방한 땅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최초 고려인 정착지 카자흐스탄 우쉬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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