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3대기생 이난향



이난향 (1900~1979)
이난향은 평양 태생으로 15살에 서울로 와 당대 가장 유명한 4대 기생조합중 하나였던 조선권번에 입적하였다.
그는 이왕직아악부 지도사범 하규일(1867~1937. 이 분은 근세 가곡의 거장임)로부터 정악가무일체를 배웠으며,
하규일의 수제자로서 하규일로부터 자신의 모든 제자를 통틀어 가장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았다.
이난향은 모든 노래를 두루 잘 불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잔노래와 가사가 장기였다.
그녀가 부르는 가사는 전달이 분명하고, 명쾌한 시김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을때, 한 신문사 기자와 결혼해 기생일은 청산하고 집안살림에 전념하게 된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여 결혼 후에도 틈날 때마다 하규일에게 노래를 배우며 연달아 노래 네 바탕을 배웠을만큼
가곡 수련에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그 열성으로 가곡으로는 첫 레코드판을 녹음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레코드판은 현재 국악음반박물관에 소장중이다.
덧붙여 주목할만한 부분은 현재 가곡전수관 관장을 맡고 있는 인간문화재 조순자 명인(1944~) 역시 그녀에게 가르침을 사사받은 제자이다.
<다음은 이난향이 언급된 '삼천리 8권 6호'에 실린 내용 전문이다.>
이난향의 본 이름은 선비이다. 대정 8년부터 기생으로 나섰으니 난향이 나이 19였다.
평양이 역시 그녀의 고향이었고 춤 잘추고 노래 잘하고 양금 잘 타기로 그 당시 장안의 남자들은 어누 누구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더욱이 이난향은 얼굴 잘나고 거동 곱고 말소리가 맑을 뿐더러 하나 물으면 열을 아는 재주덩어리였으니 그것은 난향의 맑은 두 눈동자와 넓죽한 이마에 그 재주가 들었다고나 할 것이다. 글 잘하는 사람들도 난향이요. 돈 잘 쓰는 궐자들도 난향이었다. 그러더니 난향이 기적에 몸을 둔 지 15년째 되는 소화 8년 봄, 꽃피고 새 지저귀던 때 그녀의 나이도 30년의 고개를 넘게 되니 머지않아 닥쳐올 얼굴의 주름살을 막을 길 바이없음을 느꼈던지 난향은 영남의 어떤 부호의 사랑과 짝을 지어 화류계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지금에는 아들 딸 많이 낳고 무심한 세월만을 손꼽고 있으리라.


설리 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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