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공장의 악마들 - 지존파 사건





 
 
살인 공장의 악마들
- 지존파 사건



더 못죽인 게 한이다!
1994년 9월 20일, CNN을 포함한 전 세계의 방송이 서울의 서초경찰서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양손에 수갑을 찬 채 고개는 빳빳이 쳐들고 두 눈에 살기를 띠며 빽빽이 들어찬 카메라들을 향해 "더 못죽인 게 한이다!"라고 소리치는 살인범들의 모습이 전 세계로 방송된 것이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서울 거리로 대표되던 한국 이미지가 '살인 공장'을 차려놓고 5명을 연쇄 살인한 것으로도 모자라 사체를 소각로에 태워버린 광기어린 살인 집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이들의 엽기적인 범죄 행각에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경찰은 밀려드는 취재 열기를 막지 못했다. 그 결과 스스로 '지존파'라고 이름붙인 이 살인 집단은 졸지에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특권을 누렸던 것이다.

"돈 많다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이 싫었다."
"압구정동 야타족들, 돈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놈들은 다 죽이고 싶었다."
"시작도 못하고 여기서 끝난 게 안타깝다."
"피해자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지만 사회에 복수하고 싶었다."
"우리가 그들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불공평한 우리 사회가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자들에게 내리는 벌이다."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듯 자신들의 범행을 합리화하고 보란 듯이 과시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모방 범죄의 우려를 강하게 던져주었으며, 실제로 지존파 사건 이후 '막가파', '온보현'등 사회의 주목을 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모방 범죄가 잇따랐다.
2004년 여름 국내는 물론 전 세계를 떠들석하게 한 연쇄살인마 유영철 역시 지존파의 아류라고 할 수 있다.


왜 지존파인가?
김기환(26세, 강간 치상 1범), 강동은(21세, 특수 절도 2범), 김현양(22세, 상해 1범), 문상록(23세, 특수 절도 3범), 백병옥(20세, 특수 강도 등 2범), 이경숙(23세, 여, 절도 1범), 강문섭(20세) 등 모두 7명으로 이루어진 이 살인 집단은 1993년 4월 도박판에서 만났다.
이들은 같은 전과자라는 공감대와 무협 소설, 홍콩 액션 영화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그리고 불우한 환경을 비관하며 가진자들에게 막연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기투합하여 자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한탕'을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조직에는 보스가 있고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고,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김기환이 두목이 되면서 그가 좋아하는 홍콩 영화 <지존무상>을 본떠 조직의 이름을 '지존파'라고 정했다. 스스로를 '지존'이라 칭한 김기환은 "돈 많은 자들을 저주한다", "돈 많은 자들에게 10억원을 뺏는다", "조직을 배반한 자는 죽인다" 라는 세가지 강령을 내걸었다. 그리고 부하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가혹하게 훈련시키며 절대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이들이 범죄 욕구와 조직적인 결속력을 강하게 다진 계기가 된 것은 '대학 입시 부정' 사건이었다. 대학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자신들이 실패한 것은 잘못된 사회, 가진자들의 비리 때문이라고 여기던 차에 돈을 주고 대학에 입학하는 부자들의 모습이 연일 보도되자 함께 흥분하며 범행 의지를 다졌던 것이다.

연쇄 살인을 위한 준비
이들 7명은 김기환의 계획에 따라 '가진 자들을 향한 복수' 자금을 모으기 위해 함께 막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1차로 1993년 5월부터 11월까지 대전에 있는 '둔산 신도시' 건설 현장에서 일하면서 받은 노임을 모았다. 11월부터는 2차로 경기도 분당 신도시 건설 현장에서 일하면서 돈을 모았다.

그런데 두목 김기환은 본격적인 범행에 들어갔을 때 잡히지 않으려면 영화에 나오는 전문 킬러 수준의 기술과 담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살인 예행 연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둔산에서 노동일을 하며 합숙하던 1993년 7월 18일 밤 11시경, 조직원들을 끌고 충남 논산의 한적한 마을로 들어가 그 근처의 인적이 없는 철길 옆에서 마침 혼자 귀가하던 여성(최모양, 20세)을 발견하곤 납치를 지시했다. 그리곤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대전 유성구 '계룡대' 주변 야산으로 데려가서 차례로 강간한 뒤 김기환이 "사람은 이렇게 죽이는 거야"라며 마치 시범을 보이듯 최양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최양의 사망을 확인한 김기환은 조직원들을 시켜 땅을 파고 시신을 암매장했다.

한달 뒤 공범 중에 스물 세 살이라고 형행세를 하며 다른 공범들에게 선배 대접을 받던 송봉우의 실제 나이가 열여덟 살임이 밝혀지자 보복을 두려워한 송군이 공동 예금통장에서 300만원을 인출해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추적끝에 경기도 시흥 친척집에 몸을 숨기고 있던 송군을 찾아낸 지존파 일당은 "다 용서해줄테니 화합을 다지는 차원에서 개나 잡아먹으러 가자"며 유인해낸 뒤 전남 영광군의 속칭 '불암산'으로 갔다. 산에 올라가자 약속과 달리 송군의 두 손을 철사로 단단히 묶은 다음 집단 폭력을 가한 일당들은 '배신한 자는 죽인다'는 강령에 따라 돌아가며 송군을 돌로 내리치고 칼로 찌르고 곡괭이로 찍어 살해한 뒤 암매장했다. 송군을 유인하기 위해 실제로 개를 차에 싣고 간 일당은 송군의 시체를 암매장한 후 그 자리에서 개를 잡아먹었다.
대전과 분당에서 노동으로 돈을 모은 뒤 지리산에 들어가 일주일동안 합숙하며 체력 훈련과 살인 연습 등 철저히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야영을 하고 물 외에는 일체 먹지 않으면서 인내심을 키웠다. 또한 범죄 조직원들의 의리를 묘사한 소설과 교도소 생활을 담은 책, 일본 야쿠자 소설 등을 돌려 읽으며 정신 무장을 강화했다.



'살인 공장'을 만들다
1994년 5월, 일당은 전남 영광군 불갑면에 있는 두목 김기환의 어머니 최모씨(78세)의 외딴 집으로 왔다. 김기환은 어머니에게 "집을 새로 지어 드리겠다"며 이웃 마을에 단칸방을 빌려 내보낸 뒤 8월까지 4개월동안 외딴집을 범죄 아지트로 개조했다. 다들 건축 공사장에서 잔뼈가 굵은 터라 대지 117평, 건평 38평의 역(逆) 기역자 형태로 순수 슬래브 건물을 지으면서 완전 범죄를 위한 치밀한 장치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적한 시골인데도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본채와 20여 미터 떨어진 대문에 전력검침기를 설치하고 자기들끼리 이용하는 신호용 초인종과 외부인이 사용하는 인터폰을 별도로 설치했으며 방 3개와 지하실을 인터폰으로 연결해두었다. 차고 겸용으로 쓸 창고를 따로 지어 용접용 산소통 2개와 절단기 등 각종 범행 도구들을 비치했고, 창고 한구석의 철판 뚜껑 밑에는 지하 아지트로 통하는 나무 계단까지 설치했다.

계단을 내려가서 오른쪽으로는 둔중한 철문을 설치했는데, 이 철문 뒤에는 1미터 간격의 통로를 사이에 두고 경찰서 유치장처럼 쇠창살로 막은 감금 장소를 만들었다. 지하 계단에서 정면을 향해 설치한 또 다른 철문 뒤에는 사체와 증거 등을 태우기 위해 2평 남짓한 '소각장'을 만든 뒤 소각로의 연소통을 집 뒤편에 있는 대형 환풍기와 연결했다.

두목의 투옥
아지트 건설 작업이 한창이던 6월 17일, 두목 김기환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평소 눈여겨봤던 동네 선배의 조카인 중학교 1학년생을 강간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김기환은 유죄가 인정돼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뒤 광주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두목을 잃은 지존파 일당은 어찌할 줄을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김기환에게 면회 갈 때마다 지시를 받는 등 '원격 조정'에 의해 범행 준비를 계속했다. 아지트의 구체적인 구조와 시설에 대해 일일히 김기환의 지시를 받아 작업을 진행한 일당은 8월 말쯤 작업이 다 끝나자 교도소에 있는 두목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범행을 지시받기에 이르렀다.

두목 김기환이 옥중에서 남긴 지시는 "고급 승용차를 탄 사람들을 나비해서 아지트로 데려온 후 고문하고, 몸값을 최대한 받아낸 다음 죽여라"였다.

잘못 짚은 범행 대상
9월  8일 새벽, 교도소에 수감된 두목을 제외한 5명의 지존파 일당은 트럭과 승용차에 나눠타고 러브 호텔이 많아 불륜을 저지르는 부유층들이 많이 다닌다고 알려진 경춘가도 양수리 부근으로 갔다.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새벽 3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나타났고 지존파 일당이 운전하는 승용차와 트럭은 이 고급 승용차의 앞뒤를 가로막고 강제로 차를 세웠다. 앞지르기 시비라고 짐작한 고급 승용차 운전사가 차에서 내렸고, 일당들은 다짜고짜 가스총을 쏘고 각목을 마구 휘둘러 남자를 쓰러뜨린 뒤 허벅지를 칼로 찔러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존파 일당들은 널브러진 남자의 손과 발을 포장용 테이프로 묶고 입에도 테이프를 두른 다음 트럭 화물칸에 싣고 덮개를 덮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납치했다. 고급 승용차 안에는 20대 여성이 타고 있었는데, 지존파 일당 중 3명이 고급 승용차에 동승해 이 여성을 위협하면서 역시 전남 영광 아지트로 납치해왔다.

아지트로 돌아온 일당은 납치해 온 남자와 여자를 지하 감금 시설에 가둔 뒤 여성을 집단 강간했다. 저녁이 되자 지존파 일당은 두목이 지시한 대로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신분과 가족 관계등을 추궁했는데, 남자는 밤무대에서 반주하는 약사 이건중(가명, 34세)씨였고 여자는 카페 여종업원 이예나(가명,27세)씨로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음날 일당은 의논을 거듭한 끝에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계속 감금해 둔 채 성폭행하기로 결정하고는 몸을 다쳐 신음하고 있는 이건중씨에게 억지로 술을 먹여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예나 씨가 건중씨의 머리에 비닐 봉지를 씌우고 목을 조르는 살인 과정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다음날인 9월 10일, 사체를 건중 씨 소유의 고급 승용차 운전석에 앉힌 채 전북 장수군의 인적이 뜸한 벼랑 위에서 18미터 아래 절벽으로 차를 밀어 떨어뜨림으로써 마치 음주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처럼 위장했다. 일당은 예나 씨가 '공범 의식'을 느껴 자신들과 함께 머물도록 하기 위해 이번에도 예나 씨를 범행 과정에 강제로 참여시켰고, 범행이 끝나자 다시 집단 강간했다.

지존파 일당은 하루 전에 미리 그 장소에 와서 차가 급제동을 하면서 길에 바퀴 자국을 남기는 '스키드 마크'까지 만들어놓는 치밀함을 보였고, 그 결과 이 사건은 음주 운전으로 인한 단순 교통 사고로 처리되었다가 지존파 일당이 검거된 후 진상이 밝혀졌다. 당시 차 안에서 발견된 건중 씨의 시체는 맨발이었고, 사고 지점이 건중 씨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장소라는 점, 건중 씨가 4일간 행방 불명 상태라 가족들이 실종 신고를 낸 상황임을 감안하면 좀 더 면밀한 수사가 필요한 단서들이 있었다. 경찰이 이를 놓쳤던 점이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중소 기업 사장 부부의 안타까운 희생
건중 씨의 사체를 유기한 지 사흘이 지난 9월 13일 저녁, 아직까지 범행의 본래 목적인 돈을 강탈하지 못해 초조해진 지존파 일당은 다시 돈이 많아 보이는 표적을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신흥 부자가 많기로 소문난 경기도 분당으로 갔다. 몇달 전 범행 준비를 하며 막노동을 한 터라 잘 알고 있는 공사 현장 인근이었다. 

마침 추석 하루 전날이라 가까운 곳에 있는 '공원 묘지'에 미리 벌초하러 온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 중에 경남 울산에 위차한 (주)S기계 공업의 소진영(가명, 42세) 사장과 아내 박민지(가명, 35세) 여사도 있었다. 멀리서 찾아와 부모의 묘를 정성껏 다듬고 가는 효자 효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존파 일당은 건중 씨와 예나 씨를 납치할 때와 유사한 방법으로 소사장 부부를 납치해서는 전남 영광 아지트에 있는 지하 감방에 가두었던 것이다.

14일 새벽 1시, 지존파 일당은 소진영 사장에게 "살려 보내줄 테니 회사 총무부장에게 전화해서 현금 1억원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하라"고 요구했다. 소사장은 시키는 대로 총무부장에게 전화해서 오후 1시, 전남 광중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돈을 건네 받기로 했다. 일당은 박여사는 인질로 지하 감방에 감금해둔 채 소사장과 광주 약속 장소로 가서는 소사장만 보내 돈을 받아오게 하고 자신들은 차에 앉아 감시하는 방법을 택했다(2004년 12월 초 중소기업 회장 일가족을 납치하여 같은 방법으로 돈을 빼앗은 일당이 경찰에 모두 검거되는 등, 이후 이러한 지존파의 납치 강도 수법을 흉내 낸 모방 범죄가 여러 건 발생했으나 모두 검거되었다). 

부인의 생명을 담보로 잡고 있으니 허튼 수작을 하면 알아서 하라는 협박을 뒤통수에 달고 총무부장 일행을 만난 소사장은 고개를 숙인 채 "납치됐어, 따라오지마!"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돈가방을 받아들자마자 뒤돌아서 왔다.

총무부장 일행은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 있다가 회사로 돌아온 뒤 사장 주변 사람들에게 정황을 확인한 후 저녁 6시, 관할 울산 남부 경찰서에 신고했다. 울산 남부경찰서는 즉시 소사장이 돈을 건네받은 지역인 광주 서부경찰서에 통보하고 공조 수사 체제에 들어갔지만 납치되었다는 사장의 말 한마디 외에는 단서도, 증거도 없는 상황이라 수사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다.

한편 처음으로 범행 목적인 '거액 현금 강탈'에 성공한 지존파 일당들은 소사장 부부를 살해해 증거를 없애는 것이 두목 김기환의 뜻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다음날인 9월 15일 새벽 3시, 극심한 공포심과 풀려날지 모른다는 희망이 뒤섞인 혼란한 심정으로 잠을 못 이루던 소사장 부부는 납치범들의 지시에 따라 억지로 과음을 했고 지존파 일당은 술에 취해 의식이 혼미해진 이들에게 공기총을 쏜 다음 칼과 도끼등을 마구 휘둘러댔다. 지존파는 이 살인극에도 인질 예나 씨를 억지로 참여시켜 죄책감과 공범 의식을 갖도록 했다. 혹시라도 도주할 생각을 못 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지존파 일당은 소사장 부부가 사망한 뒤에도 증거 인멸을 위해 칼과 도끼 등으로 사체를 절단한 뒤 소각로에 넣고 태워버렸다. 사체를 태우는 사이 혹시 냄새나 연기가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당에 불을 피우고 돼지고기를 구워먹는 치밀하면서도 엽기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세상을 향한 전쟁'의 준비
사전 합숙 훈련과 노동을 통한 자금 모으기, 살인 예행 연습, 아지트 구축, 배신자 처단을 통한 조직 결속력 강화, 납치한 여성의 노예화, 연쇄 살인과 납치 강도 등 계획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자 지존파 조직원들은 어린이 강간치상죄로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지존' 김기환의 지도력과 자신들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더욱 대담한 범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준비는 '무기 구입'이었다. 서울 청계천과 부산 무기 밀매상 등을 통해 다이너마이트, 공기총, 가스총, 군용 대검, 전자봉, 전기충격기, 무전기 등을 구입했고, 자동 소총과 실탄 등 '진짜 총' 구입을 의뢰해두었다.

두번째 준비는 공격 대상인 '진짜 부유층 명단' 확보였는데, 지존파 일당은 언론을 통해 부유층 고객이 많인 고급 백화점으로 잘 알려진 H 백화점의 주요 고객 명단을 입수했다. 영문을 모르는 고향 선후배에게 돈을 주고 백화점 직원을 소개받은 뒤 수백만원을 주고 빼낸 정보였다.

세번째 준비는 '조직원 보강'이었다. 식사 준비와 잡일 등을 시킬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영광읍 J 주점 종업원인 절도 전과 1범의 이경숙을 지목했다. 소사장 부부를 살해한 뒤인 9월 17일, 이경숙과 평소 친분이 있던 강동은이 주점을 찾아가 이경숙이 진 빚 1,600만원을 대신 갚아주고 이경숙을 데려왔다.

이들은 또한 중국 등 '해외 전지 훈련'을 통해 결속력을 다지고 시야를 넓혀 범죄 수법을 향상시키겠다는 계획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예기치 못한 사고, 필사의 탈출
9월 15일 아침, 영화에서 본 대로 다이너마이트 설치, 투척, 폭파 등을 위한 모의 훈련을 하던 일당은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했다. 폭발물을 다를 줄 몰라 퇴관을 잘못 건드린 김현양이 손에 심한 화상을 입은 것이었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인질인 예나 씨와 둘이서만 영광 읍내 병원에 간 김현양은 예나 씨에게 현금 50만원과 휴대전화를 건네주면서 가족처럼 행동하고 치료비를 지불하라고 지시하고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 밖에 혼자 남은 예나 씨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맥박이 빨라졌다. 그 길고 참담한 감금 상태에서 처음으로 벗어났지만 언제 어디서 이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지 몰라 두려움과 공포심에 감히 발을 떼기가 두려웠다. 용기를 내어 주변을 둘러보니 악귀같은 지존파 일당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낯선 사람들 중 누가 그들의 가족이나 친지일지 몰라 섣불리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예나 씨는 마치 화장실에 가듯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것 같고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느낌이 들어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고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다 빠져나가는 듯 했다. 죽을 힘을 다해 걸음을 옮기며 병원문을 열고 나서자 택시가 서 있었고 예나 씨는 얼른 택시에 올라탔다.

"아저씨, 빨리 출발해주세요!"

행선지가 어디냐는 물음에도 '무조건 빨리' 만을 외친 예나 씨는 택시 기사도 믿지 못해 병원을 벗어나 한적한 농촌 마을에 들어서자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근처에 보이는 '포도 농원'으로 들어간 예나 씨는 인상 좋고 친절해보이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급히 큰 도시로 가야해서 그러는데, 돈은 섭섭지 않게 줄테니 믿을 만한 운전 기사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불러 준 '무허가 택시'를 타고 전남 광주로 간 예나 씨는 다시 광주에서 택시를 대절해 서울로 올라온 뒤 역삼동의 한 모텔에 투숙해 몸을 숨겼다.

병원에서 탈출한 뒤로 10여시간이 불안과 공포심에 떨며 도망다닌 예나 씨에게는 마치 몇년의 세월 같았다. 모텔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려던 예나 씨는 너무 충격적인 경험을 한 뒤라 도저히 상황 파악이 안 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도 없었다. 가까스로 생각해낸 것이 가장 믿을만하고 세상물정을 잘 아는 김정춘(가명, 31세, 남)씨의 전화번호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김정춘 씨는 모텔로 와주었고,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후 경찰서로 가자고 예나 씨를 설득했다. 

9월 16일 새벽 2시, 김정춘 씨와 이예나 씨는 서초 경찰서 형사계를 찾았다. 

지존파를 검거한 고병천 전 송파경찰서 수사과장

지존파의 광란을 끝낸 '영광 전투'
- 잠복 수사

처음 예나 씨의 이야기를 들은 서초경찰서 강력반 형사는 도저히 그 내용을 믿을 수 없었다. 겉으로 표현은 못했지만 혹시 정신 이상이 아닌지 의심했으며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를 하며 장난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예나 씨와 함께 납치된 이건중 씨가 전북 장수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과 중소기업체 사장 부부가 납치되었다는 신고가 있었던 것이 사실로 확인되자 서초경찰서 강력반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하여 예나 씨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 계획을 수립했다.

예나 씨의 진술대로라면 지금쯤 일당은 도주한 예나 씨가 경찰을 이끌고 검거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은신처를 옮길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이너마이트 등 중 화력을 갖춘 일당에게 섣불리 접근할 경우 큰 화를 부를 수도 있어 신중하고 치밀한 '작전'이 필요했다.

수사진은 일단 전남 영광에 있는 범인들의 아지트 주변에 잠복해 상황을 살피면서 범인들이 외출하는 틈을 노리기로 했다. 예나 씨의 희미한 기억을 따라 영광시 일대를 뒤지던 형사대는 범인들이 신축한 외딴 건물을 발견했고, 곧 잠복 수사에 들어갔다.

9월 19일 아침 7시 반, 트럭 한 대가 범인들의 아지트에서 나와 마을 쪽으로 향했다. 형사대는 뒤따라나오는 차량이 있는지 살피며 트럭을 미행했고, 1.5킬로미터 지난 시점에서 트럭을 세운 후 격렬한 격투 끝에 운전자를 체포했다. 체포된 자는 특수 절도 등 전과 2범의 강동은(21세), 지존파 조직의 행동대원으로 가장 과격하고 잔인했다.

- 굴에서 끌어내기 작전

격렬히 저항하는 강동은을 수색하고 추궁한 결과 현금 200만원을 가지고 장을 보러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차량 매매 계약서가 발견되었는데, 그 매매 계약서에는 지존파 아지트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범행에 쓸 새 차를 구매하려고 한 것이었다.

충분한 사전 논의와 예행 연습을 한 뒤 경험이 많은 베테랑 형사가 전화를 걸었다.

"거기 강동은 씨 집 맞지요? 강동은 씨가 교통 사고를 당해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그런데 강동은 씨가 현금 200만원과 중요한 서류 같은 걸 가지고 있기에 지서에 맡겨두었으니 찾아가세요"

"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수회기 너머의 범인이 경계심을 나타내자 형사는 매매 계약서에 있는 번호를 보고 전화했다고 태연하게 대답해 경계심을 무너뜨렸다.

오전 9시, 승용차 한 대가 도착했고,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려 지서로 들어왔다. 강동은이라는 이름을 입밖에 내자마자 남자는 형사의 업어치기에 바닥으로 꼬꾸라지고 양손에 수갑이 채워져 완전히 제압당했다. 붙잡힌 남자는 특수 절도 등 전과 3범인 문상록(23세)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문상록이 나오지 않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나머지 범인들은 차를 몰아 도주하기 시작했다. 20여 킬로미터에 걸친 숨막히는 추격전이 벌어졌고, 범인들의 차량은 길가 담배력을 들이받는 사고를 낸 후에야 멈춰섰다. 차가 멈추자 형사들이 달려 들었고 격렬한 격투 끝에 운전자를 체포했는데, 차안에는 여자도 한 명 있었다. 체포된 범인들은 상해 전과 1범인 김현양(22세)과 이틀 전에 지존파에 합류한 절도 전과 1범의 이경숙(여, 23세)이었다.

- 악마굴 소탕하기

체포한 강동은을 이용해 조직원 일부를 아지트 밖으로 유인해낸 경찰은 이제 아지트에 웅크리고 있는 잔당을 소탕해야 했다. 두 쪽으로 나뉜 범인들은 동시에 공격하지 않으면 서로 연락을 취해 도주하거나 폭파 등 큰 피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치밀하면서도 효과적인 작전이 필요했다. 예나 씨의 기억과 검거된 강동은의 진술에 의하면 범인은 5명으로, 승용차를 타고 지서로 온 범인이 2~3명임을 감안하면 아지트에는 2~3명이 있었다. 하지만 아지트에는 폭발물과 총기류 등 무기가 가득했기 때문에 섣불리 공격할 수가 없었다.

서초경찰서 형사대는 관할 영광경찰서에 협조를 요청했고 영광경찰서는 형사 20명을 현장에 보내주었다. 지서에서 잠복중이던 형사대에서 1명을 검거하고 달아난 승용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는 무전 연락을 받자마자 20여명의 형사대는 아지트를 급습했다. 범인들의 총격이나 폭탄 공격이 시작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형사들은 범인들의 저항의지를 조기에 꺾기 위해 동시에 공포탄을 쏘고 소리를 지르며 진입했다.

하지만 범인들은 형사들의 습격을 전혀 예상치 못한 터라 무방비 상태였다. 조직원 중 막내인 강문섭(20세)은 방에 앉아 있다가 저항도 못한 채 체포되었고, 같은 나이지만 특수 강도 등 전과 2범인 백병옥은 범죄자 특유의 직감 때문인지 형사들의 진입과 동시에 뒷문 유리창을 깨고 달아났다. 백병옥에 대한 대대적인 추적과 수색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은 대나무 밭에 웅크리고 숨어 있던 백병옥을 검거했다.

경찰의 수색 결과 범인들의 아지트에서는 각종 무기류와 총기류, 폭발물 등 범행도구 18종 70점이 발견되었고, 현금 3,500만원과 서울 고급 백화점의 고객 명단을 비롯한 추가 범행 준비 문건 등 증거물이 다량 발견되었다.

드러난 진실과 안타까운 사연
검거된 일당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지존파 일당의 범행에는 정보 제공이나 알선 등을 한 공범들이 있었다. 물론 자신들이 제공한 정보나 도움들이 어떤 일에 쓰이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이루어진 일들이었지만 돈을 받고 자신이 일하는 백화점의 고객 명단을 빼내거나, 불법 무기류 등을 판매하거나 알선하는 등 그 하나하나가 범죄 행위였다. 이렇게 지존파의 범행에 직간접적인 도움을 준 공범으로 7명이 추가로 검거되었다. 특히 백화점 고객 명단에는 모두 1,200명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고액 거래자 순으로 기록되어 있어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지존파 일당들이 구입해서 보유하고 있었던 무기류와 백화점 고객 명단, 그리고 "더 못 죽인 것이 한이다"라고 외치는 모습 등을 종합해볼 때 이예나 씨의 용감한 탈출과 그에 따른 경찰의 기민한 대응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를 더욱 큰 충격과 혼란에 빠뜨릴 추가 범행이 자행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작은 범법 행위 하나가 얼마나 커다란 피해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지존파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 중 가장 가슴 아픈 것인 소사장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이다. 어린 두 딸을 둔 부부는 누구보다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으며, 작은 중소기업체를 운영했지만 부도 직전의 기업을 인수해 전 재산을 털어넣고 회생시키려 애쓰는 중이었기에 결코 지존파 스스로 정한 범행 대상인 '가진 자'라고 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특히 납치된 후 소사장이 범인들에게 전한 편지가 발견되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는데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회사를 작년에 인수해서 흑자 경영을 해보려고 막 기계 설비를 들여놓는 중입니다. 회사 사정이 많이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지금 형편상 마련할 수 있는 돈은 4,300만원 뿐입니다. 제 통장을 확인해보시면 알 겁니다. 어렵게 마련한 회사인만큼 꼭 살려서 어엿한 기업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하는대로 다 하고 있는 돈도 다 드리겠습니다. 돈은 벌면 되니까 아까워하지 않겠습니다. 경찰에도 알리지 않겠으니 제발 제 아내와 딸들을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돈을 마련해 나오라고 하고 사전에 저와 약속해서 가까운 곳에서 제 아내를 인질로 잡고 있다가 돈을 전달받으면 후에 놓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상의 말씀은 남아의 약속으로 꼭 지키겠습니다. 나도 어렵게 살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도 남의 돈을 훔쳐 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또 한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으로서 돈 아까워하지 않고 다시 열심히 벌면되니까 허튼 짓 안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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