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위한 최후의 수단, 식인과 그 사례들

식인은 아사 직전까지 몰린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극단적인 생존 방법이다.

오늘은 식량이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식량으로 삼은 사례들을 살펴보자.


1. 맥퀴리 하버 탈출 사건

1820년대 초, 영국의 감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영국정부는 좀도둑에서부터 살인마까지

다양한 죄질의 범죄자들을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호주 남부 해안의 섬, 타스메니아로 이동시켰다.


< 타스메니아의 위치 >


특히 죄질이 나쁜 죄수들은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맥퀴리 하버로 보내져 수년간 고된 노역을 견뎌야 했다.

< 타스메니아의 맥퀴리 하버 >


이곳의 노역 생활은 악명이 자자했는데 차라리 교수형을 당하고 싶어 동료 죄수를 죽인 죄수가 있을 정도였다.


1822년 9월, 공동 작업에 동원된 8명의 죄수들은 고된 노역 생활을 견디지 못해 탈출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간수를 뒤에서 덮친 후 나무에 묶고 약간의 식량과 도끼 하나만 들고 달아났다. 탈출한 8명은 배를 훔쳐 타고 아시아나 남미로 가려고 했다.


죄수 8명은 배를 훔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탈출 사실은 곧바로 알려졌고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항구가 폐쇄당했다.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해 숲이 울창한 미개척지를 지나 육지의 다른 거주지로 향했다.

육지로 탈출을 감행한 죄수들은 꽤 있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음을 알았지만 그들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 항구 / 육지 이동경로 ( 화살표 ) >


100km에 달하는 가파른 산맥에는 나무위의 까마귀외엔 먹을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8명중 로버트 그린힐이란 죄수가 무리의 리더가 되었다.

그린힐은 선원 출신으로 태양과 별로 방향을 볼 줄 알았으며 유일한 무기인 도끼를 가지고 있었다.


탈출을 감행한지 8일째에 그들은 완전히 기아상태가 됐다.

앞서가던 5명의 죄수들은 체력이 약해 자꾸 뒤쳐지던 3명을 귀찮게 여겼고 결국 8명의 죄수들은 강한쪽과 약한쪽 2무리로 나뉘게 되었다.
리더인 그린힐과 그의 친구인 트레버스, 보든햄, 매더스 , 피어스가 한무리를 이뤘고 달튼, 케널리, 브라운이 또 한무리를 이뤘다.


밤이 되자 두 무리가 따로 불을 피우고 잠을 청했다. 그때 리더인 그린힐이 자신의 무리에게 소름 끼치는 제안을 했다. 
선원이었던 그린힐은 선원의 관습을 예로 들었다.

선원들의 관습이란 생존이 어려울 시 최후의 수단으로 제비뽑기를 해 선택된 한 명을 먹고 나머지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절박했던 그린힐의 무리는 전원 찬성했다. 하지만 그들은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정하는 대신 약한 3명의 무리에서 희생자를 골랐다.

희생자로 선택된 인물은 달튼이었다. 선택의 이유는 죄수 캠프에서 달튼이 규율을 어긴 동료 죄수들을 채찍질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3명 모두가 잠들자 그린힐은 달튼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쳤다.

죽은 달튼의 시체를 농부 출신인 트레버스가 양을 도살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손질했다.

다들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지만 그날밤 달튼의 살점을 먹은 사람은 그린힐과 트레버스뿐이었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 고기 냄새에 이성을 잃은 나머지 7명의 죄수들도 달튼의 살점을 먹었다.


배를 채운 죄수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죽은 달튼과 한 무리였던 브라운과 케널리는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고 앞의 5명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다시 맥퀴리 하버로 돌아갔다.

그들은 다음 희생자가 자신들이 될 거란 것을 너무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린힐의 무리는 한참 후에야 2명이 없어진 것을 알았고 이로 인해 그들의 서바이벌 게임에는 큰 차질 생겼다.

5명의 죄수들은 한 번의 살인으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또 누군가 죽게 되리란 것을 알게 됐다.


5일 후 고기가 바닥나자 다음 희생자를 정할 때가 왔고 극도의 긴장감이 5명 사이에 흘렸다.

결국 제비뽑기를 했고 당첨자는 보든햄이 되었다. 보든햄은 그 즉시 도살당했고 나머지는 그 살점으로 굶주린 배를 채웠다.


이제 남은 사람은 4명이었다. 4명의 관계를 살펴보면 도끼를 가진 그린힐과 그의 친구 트레버스가 우위였고 나머지 매더스와 피어스가 약자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굶주림이 다시 그들을 덮쳐왔고 어느덧 다음 희생자를 정해야 할 때가 왔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매더스는 피어스에게 둘이서 그린힐과 트레버스를 덥쳐 도끼를 빼앗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피어스가 택한 것은 강한 쪽이었다. 피어스의 배신으로 매더스는 그다음 식사 거리가 됐다.


이제 남은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친구 사이인 그린힐과 트레버스 그리고 외톨이인 피어스.

누가 봐도 다음 차례는 피어스였다. 트레버스에게 불행한 사고가 닥치기 전까지 말이다.

숲에서 트레버스가 독사에 발목을 물린 것이다. 그린힐은 그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트레버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됐고 물린 부위가 썩기 시작하자 가망이 없음을 안 트레버스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소리쳤다.

결국 트레버스가 피어스 대신 다음 희생자가 됐다.


마침내 두 명만 남게 됐다. 그린힐과 피어스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팽배했다.

상대방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를 죽이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리란 것을 둘 모두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만약 그린힐이 잠든다면 피어스가 도끼를 뺏어들고 그린힐을 죽일 것이고 피어스가 잠든다면 그린힐이 피어스를 죽일 것이 자명했다.

누가 오랫동안 안 자고 버티냐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삼일 밤낮을 꼬박 샌 채로 계속 걸었다. 상황은 점점 극으로 치달았지만 죽지 않으려면 견뎌야 했다.

4일째가 되던 오후 결국 잠이 든쪽은 그린힐이었다. 그린힐이 잠들자 피어스는 곧바로 달려들어 도끼를 집어 들고 그린힐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로써 알렉산더 피어스가 유일한 생존자가 됐다.


< 알렉산더 피어스 >


신선한 고기를 확보한 피어스는 일주일을 더 걸어 탈출 50일 만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피어스는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다시 붙잡혔다.

피어스에게 숲에서 일어난 식인 행위를 들은 간수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기독교를 믿는 영국인이 식인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간수들은 피어스가 나머지 죄수들이 추적을 피하게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피어스는 다시 맥퀴리 하버로 이송됐고 다른 죄수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중 젊은 청년 토머스 콕스는 탈출을 다시 시도하자고 피어스를 들볶았다.

지옥을 경험한 피어스는 처음에는 내켜 하지 않았으나 결국 탈출에 동의했다.

육로로의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한 피어스는 킹 리버를 헤엄쳐 건너기로 했다.

< 킹 리버 >


5일간을 걸어 킹 리버에 도착해 강에 뛰어들려는 순간 콕스가 중대한 고백을 했다. 수영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피어스는 변명을 늘어놓는 콕스를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피어스는 콕스의 허벅다리와 종아리 살을 챙겨들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2~3일을 가다 보니 외로움과 후회가 엄습해왔다.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 주저앉은 피어스는 ' 더는 견딜 수 없어! '라고 외쳤다.

그리곤 해안가에서 맥퀴리 하버를 오가던 배에 자수를 했다. 피어스가 살인죄로 유죄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감된 후 독실한 신자가 된 피어스는 끔찍했던 식인에 대해 모두 털어놨다. 1824년 7월 19일, 알렉산더 피어스는 식인 행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2. 미뇨넷호 난파 사건


4명의 선원이 작은 배에 탄 채 대서양 위를 표류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 명을 희생해서 모두가 살 것인가에 대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1884년 5월 19일, 미뇨넷호의 선원들은 요트 한 척을 본국인 영국에서 호주의 새 주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 미뇨넷호 / 미뇨넷호 항로 >


미뇨넷호에는 경험 많은 경주용 요트 조타수인 선장 탐 더들리와 역시 경험이 풍부한 선원 네드 브룩스,

항해 담당 에드윈 스티븐스, 처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급사(잔심부름꾼) 리처드 파커 이렇게 총 4명이 승선해있었다.


미뇨넷호는 14년 전에 만들어진 꽤 오래된 배였고 상태가 엉망이었다.

19세기에는 배들이 부실했기 때문에 선원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위험한 직업에 속했다. 미뇨넷호가 침몰한 1884년만 해도 550척의 영국 배가 침몰했다.

항해를 시작한 지 7일 후인 7월 2일, 거대한 풍랑을 만나자 미뇨넷호는 조치를 취해볼 새도 없이 침몰해버렸다.


다행히 더들리 선장과 그의 선원들은 무사히 소형 보트에 옮겨탔지만 그대로 대서양에 표류하게 됐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통조림 2개와 나이프 1개, 경도 측정 시계뿐이고 마실 물조차 없었다.

배가 난파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세인트 헬레나와 트리스탄 드 코나로 각각 북쪽과 남쪽 1200km 지점에 있었고

희망봉은 동쪽으로 2600km, 남미는 서쪽으로 3200km나 떨어져 있었다.


< 난파 지점 >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희망봉으로 지나는 배들의 항로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표류한지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심한 갈증이 찾아왔다. 작은 보트에는 내리쬐는 햇볕을 피할 그 어떤 것도 없었다.

통조림과 빗물, 바다거북 등으로 잠깐 동안은 견뎠으나 그마저도 바닥나자 그들은 이내 허기와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했다.

표류한지 일주일쯤이 되자 갈증이 최고조에 다다랐고 항해가 처음인 파커는 목마름에 바닷물을 마시려 했다.

선장인 더들리는 바닷물이 심각한 탈수증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바닷물을 마시려는 파커를 저지했다.


더들리는 빨리 구조되지 못하면 선원 관습에 따라 제비뽑기로 희생자를 고르고 그 인육을 나눠먹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당시엔 종종 이런 경우가 선원들 사이에서 있었다. )

더들리 선장은 이것을 선원들에게 말했고 다들 망설이는 가운데 브룩스는 격하게 반발했다.

결정은 유보됐고 표류한지 3주가량이 지난 7월 20일 밤, 어린 파커는 갈증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다른 선원들이 잠든 틈을 타 바닷물을 마시고 말았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동료들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파커를 발견했다.

그가 갈증을 참지 못하고 바닷물을 마신 탓에 따로 제비뽑기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파커가 죽으면 혈액이 응고되 마실 피가 없어지기 때문에 남은 선원들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강력하게 반발하는 브룩스에게 더들리는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라고 말했다. 파커만 빼고 모두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모두가 동의한 가운데 더들리는 파커의 목을 찔러 피를 통에 담았다.



더들리와 스티븐스 통에 담긴 피를 허겁지겁 마셨고 맹렬히 반대하던 브룩스도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파커의 피를 마셨다.

세 사람은 파커의 피로 목을 축인 후 살을 발라 날것으로 먹었고 남은 살점은 햇볕에 말려두었다. 작은 보트 안은 피와 살점들로 난자했다.


< 1884년 미뇨넷호 선원들의 구명 보트 >


그로부터 4일이 지났고 남은 고기는 거의 부패했고 피는 상한지 오래였다.

7월 24일, 또 한 명의 희생자가 필요해진 순간 기적적으로 그들 눈앞에 독일 배 한 척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행히 구조됐고 2주간을 먹고 자기만 했다.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더들리 선장은 독일인 선장을 만나 그동안 있었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더들리는 동료를 죽이고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한 명을 희생해 나머지 대다수를 살렸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결정은 아니었다.


< 선장 탐 더들리 >


구조된 지 3개월이 지난 후 미뇨넷호의 생존자들은 본국인 영국에 도착했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더들리는 미뇨넷호의 주인을 찾아가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놨다.

더들리는 이것으로 소송 당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 했다. 결국 세 사람은 모두 체포됐고 더들리는 이것에 매우 분노했다.

더들리 입장에서는 선원 대부분을 살렸기 때문에 체포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들이 체포된 것은 영국 정부가 생존을 위해서라도 식인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규정지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토를 확장 중이던 대영 제국은 원주민들이 야만적이라 구원해야 한다고 했고 그에 대한 증거로 원주민들이 식인 행위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 선원이 식인 행위를 했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영국 정부는 선원 관습을 금지하기 위한 선례로 삼기 위해 미뇨넷호 선원들에게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야만 했다.

그들을 기소하기 위해서 검찰은 살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브룩스를 검찰 측 증인으로 세웠다.

브룩스는 증언을 해주고 기소를 면할 수 있었지만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리처드 파커에 대한 살인죄로 법정에 섰다.

하지만 여론의 대부분은 선원들의 편이었다.


< 미뇨넷호 사건을 실은 당시 런던 신문 >


1884년 11월, 배심원들은 더들리와 스티븐스에게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무죄를 결정했다.

하지만 판사는 이를 무효화 시키고 특별법을 이용해 자신에게 전권을 넘기도록 서류에 서명하게 했다.

결국 재판에서 더들리와 스티븐스는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선원들의 관습에 제재를 가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정부는 수감 6개월 만에 두 사람을 석방했다.

당시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더들리는 이와 같은 말을 남겼다.


" 이것으로 선원들의 관습을 금지시킨 줄 알겠지만 진실을 감추게 됐을 뿐이다.

조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관습을 따르되 구조된 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


모든 사건이 종결된 뒤 증언을 했던 브룩스는 떠돌이 서커스단에 스카우트됐다.

서커스단에서 브룩스는 식인마로 분장하고 관객들 앞에서 날고기를 씹어 먹었다. 그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 이건 내가 아니야! '라고 울부짖었다.

결국 브룩스는 궁핍하게 살다 죽었다. 불행하긴 스티븐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시의 충격으로 다신 배를 타지 못했고 브룩스와 마찬가지로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더들리는 호주에서 사업가로 성공했지만 페스트로 사망한 최초의 호주인이 됐다.

그의 가족들은 더들리가 교수형을 면한 대신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3. 파푸아뉴기니 일본군의 식인 행위


1942년, 동남아시아에서는 2차 대전이 한창이었다.

이미 수많은 나라를 침공한 일본이 남태평양 전체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가운데

호주군이 큰 비중을 차지한 연합군이 일본군에 보복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파푸아뉴기니가 중요한 전장의 중심이 됐다.


< 일본군의 침략 지역과 파푸아뉴기니 위치 ( 별표 ) >


일본군은 연합군보다 먼저 파푸아뉴기니에 상륙했으나 식량 조달의 어려움으로 고전하고 있었다.

일본 본국의 고위 장교들이 지도만 갖고 전략을 세웠기 때문에 정글에서 식량 공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던 것이다.


1942년 5월 이후, 파푸아뉴기니에 주둔 중이던 16만 명의 일본군은 식량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1943년 3월, 연합군이 일본군 수송선을 침몰시키자 식량 공급은 완전히 중단됐다.

1943년 8월 일본군 본부는 파푸아뉴기니를 포기하기로 결정했고 16만 명의 일본군들은 버림받았다.

버려진 일본군은 항복을 거부했고 그들은 연합군과 굶주림 모두와 싸워야 했다.

일본군은 배를 채우기 위해 동식물뿐만 아니라 벌레까지 보이는 것은 뭐든지 먹어치웠다.

하지만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일본군은 허기를 채우기 위해 식인 행위를 했는데 이에 대한 증거는 호주 국립기록 보관소의 비밀문서에서 발견됐다.

1993년, 공개된 이 문서에는 구체적인 식인 계획이 일본군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해 기록되어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식인을 위해 군 전체가 가담했다. 한 분대가 전장으로 가서 안전한 곳까지 시체를 끌고 오는 동안 다른 분대는 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옮겨진 시체를 절단해 요리하면 재빨리 퇴각했다.


또한 이 문서에는 전우를 구하기 위해 적진에 뛰어든 병사의 소름 끼치는 목격담도 적혀있다.


- H.F 중위는 1943년 1월 8일 전투 중 사망했다. 1943년 1월 11일 시신이 발견됐다.

잘려나간 왼팔은 보이지 않았고 종아리 살은 얇게 썰렸으며 내장도 꺼내진 상태였다.

내장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작은 가방 안에는 간으로 보이는 물체가 있었다. -


< 발견된 시체 일부 >


이런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 연합군은 보복 조치로 생포한 포로들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1942년 7월부터 1943년 1월까지 파푸아뉴기니에서 주둔했던 이마니시 사다시게는 자신은 가담하지 않았으나 일본군의 식인 행위가 있었음을 시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군 병사 하나가 죽은 사람의 팔을 갖고 다니자 다른 병사들이 나눠달라고 했고 그 병사는 힘들게 얻었다면서 거부했다.

그러자 배고픈 병사들은 손가락만이라도 달라고 했고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을 잘라 나눠줬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은 인도와 중국, 말레이시아 포로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했는데 식량이 부족해지자 그들의 인육을 먹었다.

일본군은 포로를 골라 산 채로 살을 잘랐다. 그 후 포로 참호에다 버려두었다가 아침까지 살아있으면 내장도 꺼내 요리했다.

바로 죽이지 않은 이유는 더 신선한 고기를 오래 공급받기 위함이었다.



호주의 문서를 살펴보면 호주군은 아군뿐 아니라 일본군의 잘린 시체 잔해도 발견됐다고 적고 있다.

살아남은 일본군 중위의 증언을 보면 그들 사이에서 식인 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먹을 것이 전혀 없어서 제비뽑기를 했다. 걸린 사람이 희생하기로 했지만 달아나려고 해서 총을 쐈다. 그리고 먹었다. -


2차 대전 중 파푸아뉴기니에서 식인의 가해자를 밝혀내긴 매우 힘들다.

증거라고는 익다 만 살점과 내장뿐이고 일본군 대다수가 죽었기 때문이다.

16만 명에 가까웠던 일본군은 94%에 달하는 15만 명이 파푸아뉴기니에서 사망했다.


굶주린 상태에서 얼마나 버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생존을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식인을 선택하는 이들의 상황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위의 사례들에서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상황이 자신에게 닥친다면 식인을 택할 것인가 굶어죽을 것인가? 과연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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