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게이션2

내비게이션은 금방 포장을 뜯은 새 제품처럼 잘 돌아갔다. 차가 나아갈 길과 남은 시간을 정확히 알려줬고, 

지나는 길마다 그 지역의 특산품을 줄줄 외었다. 반으로 나눈 화면의 오른쪽에는 DMB 방송까지 나왔다. 우리

는 별것도 아닌 음악 방송에 군인처럼 열광했다. 걸 그룹 서너 팀의 노래를 미친 듯이 따라 부르며 경적을 울

리다가, 5인조 남자 그룹이 나왔을 때에야 그 짓을 멈췄다.

 

수완이 말했다.


“슬슬 배가 고픈데. 빨리 어디 계곡을 찾아서 뭐라도 먹자.”

 

여태 넓적한 바위와 삼겹살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시골이라고 어디든 계곡과 오두막과 서리할 수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딜 달려도 주변은 논뿐이었고, 이따

금 옥수수밭이 보였지만 어둠 속에서 봐도 퍼렇게 덜 익은 것 같았다.

 

“내비게이션 뒀다 뭐해, 찾아봐.”

 

뒷자리에 앉은 현준의 말에 수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비게이션이 무슨 네이버 지식인이냐. 내공 걸고 '물 좋은 계곡 좀 알려주셈.' 하면 답글이라도 달릴까 봐?



“요즘 내비게이션을 뭐로 보는 거야.”

 

현준이 뒷자리에서 손을 쭉 뻗어 내비게이션 메뉴를 능숙하게 만졌다. '추천 관광지' 메뉴에서 '피서지'를 선

택하고 화면을 몇 번 넘기니 곧바로 '진광 계곡'까지 가는 경로가 그려졌다. 이어서 길을 안내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300미터 앞, 우회전입니다. 목적지까지 27분 남았습니다.

 

라면을 부숴 먹던 수완과 현준은 어느덧 잠이 들었다.

 

7시 55분. 밖은 이미 캄캄한 어둠의 세계였고, 하얀 창처럼 보이는 두 가닥 전조등 불빛이 한적한 도로 위를 

찌르듯 비췄다. 고라니나 멧돼지가 아니라, 못생긴 심해의 물고기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빽빽한 어둠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잠을 쫓으려 애썼다. 단조로운 목소리로 오른쪽이니 왼쪽이니 길을 안내하던 내비게이션 속 

여자 목소리도 조금 전부터는 잠잠히 입을 다물었다. 이제 길은 외길이었고, 가끔 숲이 에워싼 언덕길이 나올 

뿐 아무 선택지 없는 직진이 계속되었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차가운 밤 공기가 스며들었지만 연방 벌어

지는 입을 막지는 못했다.

 

눈이 따가워 잠깐 감았다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인식할 수 없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퍼뜩 눈을 떴다.

 

차는 자갈길을 달리듯 덜덜 떨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정신을 차린 나는 곧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급히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전까지 달리던 길과 전혀 다른 풍경인 듯 느껴졌다. 비로소, 꽤 긴 거

리를 졸음에 빠져 정신없이 달려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차 안 앞뒤에서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잠에 빠졌던 현준과 수완은 갑자기 차를 세웠을 때 미처 대응도 못 하

고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앞에 처박힌 것 같았다.

 

나는 뭐라 말도 못한 채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차를 멈춰 세웠기에 망정이지, 조금

만 더 깊이 잠들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전조등은 우거진 나무 사이로 난 길, 차 한 대 지나면 꽉 찰 듯한 좁은 산길을 비추고 있었다. 포장도로는 거

기서 끝이었고, 앞에 놓인 산길은 앞서서 지나간 차가 만든 바퀴 자국 빼고는 풀이 잔뜩 돋은 험한 길이었다.

 

뒷좌석에 누워 자다가 좁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현준이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사고 났어?”

 

“아냐, 아냐. 이제부터 산길인가 봐.”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러나 식은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주룩 흘러내리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

다. 깜빡 졸았다가 계곡이 아니라 황천에 발을 담글 뻔했다는 말로 친구들을 놀래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

었다.

 

“보, 보자, 내비엔…… 얼마 안 남았네, 다 와 가. 5분만 더 가면 된대.”

 

다시 자리에 앉은 현준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근대 왜 이리 추워. 히터 좀 틀지 그랬어.”

 

“인마, 벌써 6월이야. 히터라니, 무슨 환자 같은 소리야.”

 

나는 창을 아예 활짝 열며 말했다. 이미 정신은 번쩍 들었지만, 찬 공기라도 쐬어야 운전을 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차가 산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아찔한 장면이 자꾸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재영이 너, 날 죽일 셈이냐.”

 

그때까지 대시보드에 엎드려 신음하던 수완이 일어나며 말했다. 이마에 불룩한 혹이 생긴 수완의 꼴은 안전

띠를 매자는 공익광고에 나오면 적당할 모습이었다.

 

“6월이나 마나, 그놈의 이상기온인지 뭔지 때문에 추워 죽겠다.”

 

현준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난 배가 고파. 고프다 못해 쓰려.”

 

찡그린 표정으로 이마의 혹을 만지던 수완도 등받이에 털썩 기대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나 혼자 죽을 고비를 넘긴 듯한 억울한 마음에 화난 듯 말했다.

 

“알았어, 이것들아. 계곡에 도착하면 불도 피우고 거기다 삼겹살도 굽자고, 됐어? 이 편안에 찌든 승객 놈들 

같으니라고.”

 

그렇게 쏘아 주고야 불평하던 두 놈도 입을 다물었다.


Author

Lv.99 유북지기  최고관리자
1,267,164 (100%)

등록된 서명이 없습니다.

유머게시판 베스트

글이 없습니다.

Comments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