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함경도 실향민이 꼽은 최고의 냉면집

[Why] 고향의 육수맛 그대로 '평양면옥' 군침 도는 홍어회 꾸미 '흥남집'

평안도·함경도 실향민이 꼽은 최고의 냉면집

조선일보 | 한현우 기자 | 입력 2011.06.05 03:57 | 누가 봤을까? 50대 남성, 서울
 
서울 사람들이 장충동과 을지로, 오장동에 줄 서기 시작했다. 냉면 철이다. 국수를 좋아하는 한국인은 얼마 전까지도 땀 뻘뻘 흘리며 칼국수를 먹다가, 별안간 변심한 애인처럼 차가운 대접 앞으로 몰려들고 있다.

↑ [조선일보]
↑ [조선일보]2·3위를 차지한 냉면집도 수십년 단골들을 보유한 이북식 냉면의 강자들이다. 위부터 을지 면옥과 평래옥의 평양냉면, 오장동함흥냉면과 함흥곰보냉면의 함흥냉면. /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 [조선일보](왼쪽)‘실향민이 꼽은 평양냉면’1위에 오른 평양면옥의 냉면. 맑고 심심한 육수가 일품이다. (오른쪽)오장동흥남집의 냉면이‘최고의 함흥냉면’1위에 올랐다. 홍어회의 맛을 잘 살린 꾸미가 호평받았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냉면은 원래 겨울 음식이라 했다. 평북 정주 출신 시인 백석(白石)은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겨울 냉면을 반겼다. 그러나 도시에서 냉면은 여름음식이다. 겨울 냉면은 마니아들의 영역이 됐다.

분식집 냉면부터 중국냉면, 일본 냉우동까지 찬 국수는 사철 어디서나 먹을 수 있지만,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이 냉면계 부동(不動)의 양대 강자다. 이남에 내려온 이북 음식 중 가장 생명력이 질긴 음식이기도 하다.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은 서울의 수많은 평양과 함흥냉면집 중 '평양면옥'과 '오장동흥남집'을 "고향의 맛에 가장 가까운 냉면집"으로 꼽았다. 조선일보가 이북5도청의 협조를 받아 지난달 23일부터 5일간 평안도 출신 50명과 함경도 출신 50명 등 총 100명의 실향민들에게 전화로 설문조사한 결과다. 이들에게 순서대로 냉면집 3곳을 꼽아달라고 한 뒤, 1위에 3점, 2위에 2점, 3위에 1점을 매기는 방식으로 점수를 합산해 순서를 정했다. 실향민들이 꼽은 냉면집들은 어김없이 이북 출신이 창업한 수십년 관록의 음식점들이었다. 최근 몇년 새 '냉면 명가'로 떠오른 집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베스트 평양냉면집

"툭툭 끊어지지 않으면서 질기지도 않은 면발 좋아"
을지면옥 근소한 차이로 2위 꿩고기 육수 평래옥 3위
"맛있지만 비싸…" 우래옥 4위에


평양냉면―육수와 면발의 차이

평양면옥

서울 장충동의 평양면옥이 총 72점으로 1위에 올랐다. 평양면옥은 을지면옥과 적은 차이로 1, 2위를 다퉜다. 응답자 50명 중 29명이 평양면옥을, 27명이 을지면옥을 한 번씩 언급했다. 다만 평양면옥을 1위로 꼽은 사람이 18명으로 을지면옥(8명)보다 훨씬 많았다.

평양면옥을 꼽은 실향민들은 이 집 육수에 가장 큰 애정을 보였다. "육수가 가장 맑고 특유의 밋밋하고 심심한 맛을 잘 살렸다", "고향의 맛과 가장 비슷해 한번 맛보면 다른 곳은 가지 않게 된다"는 대답이었다. 이 집의 만두도 꽤 인기가 있었다. "냉면과 만두를 함께 먹으려고 간다"는 대답이 상당수 있었고, 심지어 "냉면보다 만두가 더 맛있다"는 대답도 있었다. 응답자들 가운데엔 실향민 2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선친께서 다니던 곳이라 습관적으로 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편 "요즘 들어 조미료를 많이 쓰는지 맛이 달라졌다"고 대답한 사람도 2명 있었다.

을지면옥

면발이 상대적으로 가늘고 쫄깃한 을지면옥이 평안도 출신 실향민들의 두 번째 지지를 받았다. "툭툭 끊어지지 않으면서 너무 질기지도 않은 게 장점"이라는 것이다. "이북 메밀은 차져서 메밀로만 면을 만들 수 있지만 이남 메밀은 그렇지 않아 녹말을 섞어야 하는데 을지면옥 면발이 그 비율을 가장 잘 맞춘 것 같다"는 분석도 있었다. 을지면옥의 육수도 대체로 호평이었다. "육수에서 동치미 향이 강해 고향 맛과 비슷하다"는 대답이었다. 특히 을지면옥의 돼지고기 편육을 '최고'로 꼽는 사람이 많았다. 이북5도청 회의도 이곳에서 자주 열린다고 한다.

평래옥

평래옥은 총점 46점으로 3위에 올랐다. 이 집을 꼽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꿩고기 육수'를 언급했다. 응답자들은 "산악지대인 평북에서는 꿩고기 육수를, 평야가 있는 평남에서는 소·돼지·닭고기 육수를 주로 썼다"며 "평래옥의 꿩고기 육수는 일품"이라고 했다. 평래옥은 냉면에 얼갈이배추를 고명으로 올리는데, 어떤 사람은 "배추 십히는 맛이 좋다"고 했으나 다른 이는 "이북에서는 배추잎을 올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평래옥의 특징적 메뉴인 닭무침을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래옥

총점 33점으로 4위에 그친 우래옥은 그 명성에 비해 순위가 낮았다. 많은 실향민이 "너무 비싸서 잘 안 간다"고 말했다. 우래옥의 평양냉면은 1만1000원으로, 순위에 오른 집들 중 가장 비싸다. 그러나 응답자들은 "옛날 이북식과 가장 비슷하게 하는 곳", "한우로만 우려낸 육수의 진한 맛", "다른 집보다 메밀 향이 강함"이라며 그 맛은 높이 평가했다. 평북 출신 실향민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2세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남포면옥·필동면옥

남포면옥과 필동면옥이 각각 9점씩을 받아 공동 5위였다. 동치미 담근 장독을 진열해놓고 담근 날짜까지 써놓는 남포면옥은 "정성이 돋보이는 집"이라는 호평이었다. "동치미 국물이 다른 집보다 새콤달콤하다"는 평도 있었다. 필동면옥은 평양냉면 특유의 심심한 육수가 호평받았다. "나박김치가 맛있다", "고명으로 얹는 돼지고기가 매우 부드럽다"는 평도 있었다.

베스트 함흥냉면집

"함경도 출신에게 서비스 후해"
흥남집 넉넉한 인심도 호평
"꾸미와 양념 맛있어"
오장동집 '대안 없는 2위'
곰보냉면·한주면옥 뒤이어


함흥냉면―양념과 꾸미의 차이

오장동흥남집

보통 '흥남집'으로 불리는 이 집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1위에 올랐다. 총점 122점을 얻은 흥남집은 '영원한 라이벌' 오장동함흥냉면을 무려 71점 차이로 따돌렸다. 응답자 50명 중 흥남집을 1위로 꼽은 사람이 38명이나 됐다.

흥남집을 1위로 꼽는 이유는 "꾸미로 올리는 홍어회가 맛있다"는 것이 가장 많았다. "식초에 절인 홍어회의 딱딱한 맛을 잘 살렸다", "양념과 가장 잘 어울리는 꾸미"라는 것이다. "원래 함흥냉면은 흥남 부둣가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먹던 음식"이란 설명도 있었다. 흥남집의 넉넉한 인심도 실향민들의 호감 대상이었다. "70대 이상 노인들이 가면 사리를 거저 준다", "함남 출신이라고 말하면 서비스가 좋아진다"는 대답이 많았다. 꾸미로 회와 쇠고기를 함께 올리는 "'세끼미(섞음이의 사투리)'를 먹으러 간다"는 대답도 있었다. 오장동함흥냉면은 세끼미를 팔지 않는다.

오장동함흥냉면

흥남집 바로 옆에 있는 오장동집은 비록 1위를 놓쳤으나 '대안 없는 2위'를 굳혔다. 흥미롭게도 오장동집을 선호한 사람들의 대답은 흥남집을 꼽은 사람들의 대답과 비슷했다. 오장동집 꾸미와 양념이 가장 맛있다는 것이다. "간장 향이 강한 육수가 입맛에 맞는다"는 대답도 있었다. 함흥냉면집에서 '육수'란 컵에 따라 마시는 뜨거운 육수를 뜻한다. "대를 이으면서 맛이 좀 변했다"는 대답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함흥냉면은 오장동집과 흥남집 두 군데밖에 가지 않는다"는 '골수팬'들이 대다수였다. 부친이 작년 90세로 작고했다는 한 실향민 2세는 "아버지가 생전에 '냉면 먹으러 가자'고 하시면 늘 오장동에 가자는 말씀이었다"고 했다.

함흥곰보냉면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은 3위부터는 별다른 선정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종로4가 예지동 귀금속 상가 골목에서 오랫동안 영업하다가 작년 9월 길 건너편 세운스퀘어로 이사한 곰보냉면은 "오래전부터 다니던 집이라 꾸준히 다닌다"는 대답이 많았다. 곰보냉면은 오장동의 두 집과는 사뭇 다르다. 냉면을 한번 양념에 무친 뒤 그릇에 담고 다시 꾸미를 올려 전반적으로 빨갛다. 육수는 다소 묽은 편이다.

한주면옥

여의도의 함흥냉면 강자 한주면옥이 4위에 올랐으나 점수는 고작 6점이었다. 단 2명이 1위로 꼽은 것이다. 한주면옥은 면발과 꾸미 모두 호평을 받았다. 추어탕부터 김치전골까지 두루 내놓는 이 집은 정통 함흥냉면집이라고 할 수 없으나, 냉면 자체는 비교적 좋다는 평이었다.

원조함흥냉면·함흥면옥 압구정점

종로구 예지동 귀금속 골목에 있는 원조함흥냉면과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함흥면옥이 4점씩을 얻어 공동 5위에 올랐다. '옛날집'으로도 불리는 원조함흥냉면은 오랫동안 곰보냉면과 이웃해 영업해온 집이다. 함흥면옥 압구정점은 프랜차이즈 냉면집 중 유일하게 실향민들의 낙점을 받았다.

실향민들의 냉면 먹는 법

전화설문에 응한 실향민들은 1세대와 2세대를 아울렀다. 연령대는 40대 후반부터 80대 후반까지 다양했으며 평균 연령은 평안도 출신 65.9세, 함경도 출신 68.1세였다. 최고령 응답자는 함남 함주 출신의 89세 실향민이었다. 평안도와 함경도를 막론하고 이들은 "냉면은 한겨울 엉덩이가 뜨거운 온돌방에서 먹는 게 가장 맛있다"고 말했다. 한 함경도 실향민은 "날씨는 춥고, 엉덩이는 뜨겁고, 음식은 차가운데 입은 매워서 더운, 그런 맛이 함흥냉면의 참맛"이라고 했다. 또 다른 실향민은 "장작을 때서 국수를 삶았기 때문에 국숫집 방바닥이 항상 뜨거웠다"며 "누가 국숫집에 와서 춥다고 온면을 달라고 하면 비웃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입으로 잘 끊어지는 평양냉면은 물론이고 함흥냉면도 잘라 먹는 게 아니라고도 했다. "평양냉면을 짧게 잘라 먹으면 메밀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고 했다. "종업원이 물어보º지도 않고 함흥냉면을 잘라 오면 '다시 가져오라'고 한다"는 함경도 실향민도 있었다.

평양냉면집에서 비빔냉면을, 함흥냉면집에서 물냉면을 주문하는 것은 특유의 맛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평양냉면을 비빔으로 먹으면 메밀향과 동치미 향을 맛볼 수 없고, 함흥냉면을 물냉면으로 시키면 홍어회 꾸미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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